예컨대 신문에서 누구를 지칭할 때 "목사", "신부", "교수" 등 직함만 부르지 "님"자를 붙이지 않는데, 유독 "중"만 "스님"이라고 높여 부르는 이유를 따졌던 대목을 봐도 그가 얼마나 무례하고 직설적이며 쟁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사람인지 잘 나타난다. 물론 "스님"이라는 경칭이 "중"이라는 일반 명칭을 대체한 사연은 언어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흥미로운 일이므로, 그 문제를 제기한 것만으로 그가 무례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무례한 까닭은 언어사회학적 흥미를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위해 착취하면서 의도적으로 예의에 개의치 않는 언사를 사용함으로써 은근히 특정인의 인격을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천성산 터널 공사에 반대하는 지율 스님의 단식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동정과 관심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목적에서 그는 왜 "중"만 "스님"이라고 부르는지를 따진 것인데, 언어사회학적 호기심을 빌미 삼아 지율 스님의 인격과 그의 단식 행위를 모욕하고, 나아가 스님의 안위를 걱정했던 모든 사람들의 선의를 공격했기 때문에 무례가 된다.
그런 조갑제지만 지율 스님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던 때에는 그토록 무례한 소리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물론 단식이 막바지를 지나자마자 잠시라도 더 늦출 수는 없다는 듯이 서둘러 시비를 걸고 나선 것은 지극히 조갑제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전에는 그로서도 "100일 단식이 인간적으로 가능하냐" 따위의 의문을 공언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그것이 그나마 조갑제에게도 남아있는 일말의 인간애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마음 속의 희망을 그에게 투영한 데에 불과했다. 스님의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무례를 범하지 못한 것은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이 아니라 단지 책임질 빌미를 남기지 않으려는 영악한 타산이었음이 이제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뉴시스 |
용산에서 무고한 인명이 여섯이나 희생되었다.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도 국무총리 한승수도 안타깝다고 하고 유감스럽다고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파당적 사고에 속속들이 젖어있는 정치인들은 어떻게 책임을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울까 눈동자를 굴리느라 바쁘겠지만, 이 일이 경찰의 무지막지한 진압 때문이라는 것은 민주당 대표 정세균만의 생각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갑제는 "이명박식 공안 통치가 빚어낸 일대 참극"이라는 정세균의 발언에 "민주당대로 하면 무정부상태가 온다"는 소리로 맞받았다("정세균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나?", 조갑제닷컴, 2009년 1월 20일). "응징력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주장의 연장이다 (조갑제닷컴, 2009년 1월 13일).
조갑제가 정세균 대표를 공격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국회에서 "불법 난동"을 벌이고, "촛불난동 때 폭도들과 함께 공권력에 저항한 정당"은 이런 일에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과, 아직 "책임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권력을 가해자로 낙인찍는 발언은 무정부주의 선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선 만약 자격을 그런 식으로 정한다면 조갑제야말로 아무 말도 할 자격이 없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내내 정당한 정부의 정책을 근거라고는 전혀 없는 천박한 낙인찍기로 공격했고, 한나라당이 의사당을 불법 점거할 때 공권력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지 못한다고 "쿠데타의 가능성"까지 언급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국회만 보더라도, 민주당 의원들이 해머를 휘두른 것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불법으로 점거한" 회의장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또한 민주당-민주노동당 의원들의 본회의장 점거가 합법인지 불법인지는 그 자체가 현재 정국에서 쟁점중 하나인 것이지 조갑제가 "불법"이라고 부르면 불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한민국 정치사회가 성숙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민의와 지혜를 모아 해결해야 할 일이고, 실제로 나름대로 개명된 제도화의 길을 찾아나가고 있는 일이다. 당장 자기 성미에 차지 않는 대목이 있다는 이유로, 유치하고 미개한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서 "무정부상태"니 "응징"이니 악의로 가득 찬 소음을 퍼뜨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해로운 선동이다.
▲ 조갑제닷컴 홈페이지 캡쳐. |
다음으로, "밝혀지지 않은" 책임 소재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마도 조갑제의 의도는 용산경찰서에서 발표한 "농성자에 의한 방화"라는 시나리오와 일부 목격자들이 전하는 "컨테이너의 마찰로 인한 불꽃 때문에 발화"라는 시나리오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지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인 듯하다. 그러면서도 조갑제닷컴의 메인 페이지는 "경찰에게 시너를 통째로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다", "용납 못할 철거민의 방화와 경찰의 미숙", "법 집행한 게 잘못인가?", "정부는 용산 철거민 사태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등등, 결론이 미리 정해진 글들이 "최신 정보", "사건 사고"라는 분류표를 달고 전면을 장식하고 있다.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라는 문구는 순전히 정세균에게 말꼬리를 잡기위한 구실이지, 조갑제는 이미 이 일을 "농성자의 방화"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 입으로 자신의 결론을 표명하지 못하고 "김성욱", "조영환", 또는 기타 가입자들의 입을 통해 바람을 잡는 방식은 위에서 언급했듯 조갑제식 비겁의 전형적인 모습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오류와 왜곡은 조갑제가 한국 사회의 극우 세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도 아니고 특별히 해로운 일도 아니다. 그가 현재 한국 사회에 끼치고 있는 피해는 따로 있다. 조갑제는 현 상황에 함축된 중요한 의미 하나를 보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까막눈이고, 그 때문에 시대의 진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자아가 혼란한 상태로, 혼란을 벗어나기 위해 마구 휘저어대는 몸짓이 사회에 단순한 불편 이상의 위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못 보고 있는가? 방화 때문인가 아니면 마찰에 의한 불꽃 때문인가는 세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문제인 것이 맞지만, 현재 상황에서 경찰에 대한 비난 여론은 그런 세부 사항과는 상관이 없다. 설사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이 남의 집 옥상을 점거하고서, 체포조가 접근하면 자살하겠다고 위협을 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경찰이 그 범죄자 및 경찰관의 상해위험을 가볍게 여기고 무모하게 쳐들어가서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문명사회라면 연쇄살인범이라는 혐의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도 재판 이전에 심판과 처벌이 행해지지 말고, 오로지 재판정 안에서 실체적 진실과 유무죄의 판정이 일어나야 하고, 그에 따라 처벌이 필요하다면 형벌의 종류와 방식 또한 사전에 정해진 절차에 의해서 결정되고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법에 의한 재판과 처벌이 가능하기 위한 대전제가 바로 인명 손실의 예방인 것이다.
실연이나 기타 한심할 정도로 개인적인 감상을 이기지 못해서 한강 다리 난간 위에 올라가 자살하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도 현대 국가는 "죽고 싶으면 죽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비난을 받는다. 가능한 한 그를 달래서 난간 밑으로 내려오게 한 다음에, 도로교통법 위반이든 업무방해든 적용할 처벌 조항이 있다면 검찰로 넘기고, 아니면 훈방한다. 자살 소동을 벌이는 행위가 칭찬받을 일이거나 장려할 만한 일이라서가 아니라, 경위를 막론하고 인명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문명국가의 공권력이 담당해야 할 책무이기 때문이다.
"책임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라는 조갑제의 인식은 농성자가 방화했다면 경찰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인데, 세상에 이런 소리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나올 소리인가? 화염병을 이미 사용했고 장차 화염병을 계속 만들기 위해 시너를 비축해 둘 정도라면,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임이 분명하다. 무력진압에 무력으로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말보다도 확실하게 천명한 셈이다. 그런 사람들이 점거하고 있는 옥상에 컨테이너로 경찰 특공대를 투입한다면 화염병이 투척될 것이 명약관화고 시너에 점화될 위험도 당연히 예상되지 않는가? 난간 위에서 뛰어내리겠다는 사람에게 "너 이놈 이리와 잡아서 혼찌검을 내주겠다"고 하면서 쫓아가면 체포가 무서워서라도 뛰어내리지 않겠는가? 뛰어내리겠다고 위협만 할 뿐 아직 뛰어내리지 않은 사람을 경찰이 도발해서 뛰어내리게 해놓고, "경찰이 밀었는지 스스로 뛰어내렸는지 책임 소재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우겨대면 말이 되는가?
철거민들과 재개발조합 사이의 협상 내역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질 국민은 별로 없다. 철거민들이 농성을 할 때에도 그들이 반드시 잘하고 있다고 여긴 국민도 많지 않다. 하지만 경찰이 특공작전을 펼친 까닭으로 죄 없는 생령이 여섯이나 스러진 다음에는 대다수 국민들이 경찰과 이명박 정권에게 책임을 묻는다. 이 많은 국민들이 폭도의 편에서 공권력에 저항하는 것인가? 아니면 멀쩡한 사람들까지 폭도로 몰아붙이면서 "응징"을 선동하는 조갑제야말로 평화로운 사회질서가 정착되면 자기 같은 사람은 설 자리가 없어질까봐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인가?
▲용산 철거민 참사에서 변을 당한 철거민의 유가족이 울고 있다. ⓒ프레시안 |
철거민들의 요구는 기껏해야 보상금 좀 더 달라는 것이다. 나는 해당 지역의 개발이익이 얼마나 되는지를 전혀 짐작할 재주가 없지만, 보도된 바대로 주거세입자 1400만 원이나 상가세입자 1억 원 정도의 보상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불만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고 본다. 그 조건에 동의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잘못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동의했을 뿐 자신들은 동의하지 않은 조건을 억지로 떠안기면서 철거를 강행하게 되면, 원한과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혼자서는 떠들어봐야 들리지도 않기 때문에 비슷한 억울함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농성하는데, 경찰이 해산을 강요하면 불만에는 분개가 더해진다. 경찰의 무력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겠다고 돌멩이나 골프공이나 화염병을 던졌는데, 경찰이 막무가내 진압만을 서둘러 특공대를 투입했다면, 농성자들의 과격한 반응은 자발적이었다기보다 경찰이 도발한 결과라고밖에 볼 수 없다.
역으로 가정해보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경찰이 특공대를 투입하지 않았다면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이 농성자들을 무력으로 해산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농성자들이 화염병이나 골프공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찰이 철거민들에게 표현의 자유와 시위권을 인정했더라면 그들로서도 벽돌이나 화염병을 사용할 명분이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갑제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갑제의 생각에 경찰이 폭력을 도발한다는 것은 아예 개념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경찰의 폭력은 언제나 정당한 반면에, 철거민이나 촛불시위대는 넘지 말라는 금만 살짝 건드려도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는 응징을 당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조갑제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가 강자의 편에 속해 있다는 착각과, 강자는 무엇이든 맘대로 해도 된다는 권력숭배의 발로에 불과하다. 이런 발상에서는 정치사회를 권력자와 겁에 질려 묵종하는 다수, 그리고 응징되어야 할 소수로 구성되는 것처럼 그린다. 따라서 권력자 계급이 바뀔 수도 있는 상황, 다수가 겁에 질리기는커녕 나름대로 판단해서 발언하고 요구하는 상황, 소수에 대한 응징이 맘대로 되지 않고 소수인 줄만 알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점점 설득력을 키워나가는 상황이 전개되면 조갑제의 정신은 헝클어지고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오바마의 당선만 해도 노무현의 당선만큼이나 난해하고 용납이 안 되지만, 대국의 권력에 조금이라도 시비를 걸면 곧 폭도로 분류될까봐 두려워 일단은 묵종을 택할 뿐이다. 노무현 때 그랬듯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도 상대와 한번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사납게 달려들어 물어뜯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보수로 분류해주면 안 된다. 이것은 그냥 증오와 폭력을 경배하고 숭상할 줄밖에 모르는 악의와 심술의 화신일 뿐이다. 권력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사회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악의와 심술의 온상부터 제거해 나가야 한다. 물론 이 제거는 가능한 한 의견과 공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직접적인 권력이 작용하지는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조갑제가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면 철거민들도 똑같이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형평과 공정의 원리에 부합한다.
경찰은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던져서 주변 건물에 불이 붙은 일도 있고 경찰의 채증요원이 골프공에 맞아서 부상한 일도 있어서, 진압이 시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이 애당초 그들의 시위를 권리로 인정하고 보호했더라면, 화염병도 골프공도 던질 리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재개발조합 측에게는 엄청나게 불편했을 것이다. 농성이 언제 풀릴지 기약할 수 없다면 시간이 허비되는 만큼 금전적인 손해가 상당하다는 회계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경찰이 자기편이라는 보장이 없었다면, 조합 측은 당연히 보상 조건을 조금 올려서 시간의 허비를 방지하는 방향에서 타협을 봤을 것이다. 이것이 자유시장의 원리다.
금전적인 이익을 나눠먹기 위한 흥정 과정에 국가권력이 개입해서 일방적으로 기득권을 옹호하게 되면, 당한 입장에서는 철저한 객체로 전락하든지 아니면 무력에 의한 저항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시민의 일부가 국가의 권력에 대해 주권자로서 지위를 상실하고 객체로 전락하게 되면, 이내 일부가 아니라 인민 대부분이 객체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정치사회는 소수 주인이라는 자들이 다수 인민의 노동에 기생하는 상태로 바뀌고, 인간성의 모든 가치가 퇴색하고 무의미한 생존의 반복만이 남게 된다. 조갑제는 이런 상태를 동경하면서 인민 다수가 주체적인 인격체로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유사회를 방해하기 위해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 용산 철거민 참사에서 변을 당한 철거민의 시신이 수습되고 있다. ⓒ뉴시스 |
철거민들이 재개발조합에게 끼친 불편이 다섯 농성자와 한 경찰관의 목숨을 지불해서라도 막아야 할 정도로 명백하고 현저한 위험이었다면, 악의와 심술로 가득 찬 정치이론을 선동하는 조갑제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위험요인이라고 해야 하는가? 조갑제닷컴이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다고 변명할 여지는 없다. 조갑제의 선동에 동조하든 반발하든, 성급한 단정과 편협한 정죄에 익숙한 일부 미숙한 사람들의 맘속에 그 때문에 일어나는 악감정과 폭력숭배의 불이 제지되지 않고 번져나간다면 장차 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해를 입을지 나는 그 정도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철거민들이 "극렬하게 저항해서" 강경 진압이 불가피했다고 믿는다면, 경찰은 사회 평화의 건설을 가로막으려는 조갑제의 극렬한 저항 역시 공세적으로 진압해야 한다. 만약 조갑제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철거민들에게도 표현의 자유를 전폭적으로 허용했어야 했다. 나는 물론 철거민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어야 한다고 보는 만큼, 조갑제가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인내해 줄 용의가 있다. 단지 철거민들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경찰이 왜 조갑제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조갑제를 진압하라!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