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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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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정치경제학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수퍼에 가서 라면을 보고 놀랐다. 원래 라면의 절반짜리가 시판됐기 때문이다. 84g짜리다. 말도 걸지 않았는데 주인에게 먼저 수다를 떨었다. 이제는 작은 라면이 나오는군요. 다이어트용 라면인가 보죠? 나 같은 당뇨병 환자에게는 나쁘지 않겠네요. 네? 아 네에. 당뇨병에는 되도록 라면을 피하라더라구요. 어쨌든 이제는 라면도 일본식으로 다양한 품종이 나오는군요. 그러자 이상하게도 수퍼 주인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 살짝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듯 싶었다.

집에 와서 예전에 사다놨다 남아있는 라면을 봤다. 예전 것은 140g이었다. 새로 나온 건 완벽한 반토막이네. 참, 가격은 어떤가? 예전 건 850원. 새로 나온 절반 라면은 700원. 아하 그제서야 알았다. 뒤늦게 눈치를 챘다. 그래서 수퍼 주인이 한심하게 봤구나. 이런 식으로 슬그머니 가격을 올린 셈인데 그걸 모르고 흰소리만 해댔으니 오죽했을까. 그것도 거의 1.5배 이상으로. 근데 그러면 차라리 크기는 놔두고 가격을 올리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싶었다. 그리고 또 한번 이마를 쳤다. 아아아 그렇지! 라면은 MB 관리품목이지?! 그러니 감히 가격은 올리지 못하고 크기를 줄인 것이구나.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싶었다. 영악한 해법이니까.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 반토막 라면의 출현은 그냥 그 정도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상당히 경악스러운 일이다.

라면회사 안에서는 아마도 긴급회의가 열렸을 것이다. 연일 치솟는 원자재 가격이 경영진들의 마음을 옥죄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냈을 것이다. 손가락을 튕기며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크기를 줄이면 되겠군요. 상대적으로 가격은 약간 내리고 토막을 반으로 치면 되지 않겠어요? 회의 참석자들이 박수를 짝짝짝 치며 어 그거 정말 좋은 아이디어군,했을 것이다. 그런 의견을 낸 사람은 지금쯤 아마 승진의 가도를 달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에 알게 돼 수차례 술자리를 함께 한 한 라면회사 중역도 밀가루값 때문에 죽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한 적이 있다.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말도 했다. 문제는 라면값을 올리면 당장 청와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권초기 생필품 가격의 인상을 억제, 관리하겠다며 이른바 52개 관리품목을 지정한 바 있다. 골통 시장주의자가 상품의 가격 형성을 시장에 맡기지 않겠다는 이 희한한 발상은 발상도 발상이지만 사실은 시장현실에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을 억지로 강제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의 전형이다. 서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은 약은 체, 국민들을 살살 달래려고 했을지 모르지만 정작 라면회사는 국민을 달랠 수 없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라면회사들은 지금 국민이 무섭기 보다는 라면값을 올리면 니들 죽어,라고 으름짱을 놓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 관리품목 대상인 라면값은 올리지 않는 척 사실은 국민보다 당신들 먹는 양을 줄이라고, 그게 건강에 좋은 거 아니냐고, 크기가 작으니 라면도 귀여워 보이지 않느냐고 살짝 거짓말을 해대고 있는 셈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소비자보다 대통령을 더 무서워할 때 사회는 자꾸 권위주의 체제로 가기 마련이다. 아 무서워라. 앞으로는 이런 얘기하다가 80년대처럼 쥐도새도 모르게 잡혀가 치도곤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20년이 넘게 흘렀지만 세상은 변한 것이 없을까. 어떻게 일부 교회에 모인 할머니들의 대화에서 알고보니 MBC 엄기영 사장이 빨갱이였다는 소리가 버젓이 흘러나오는 것일까. 할머니들의 머리에 그런 생각을 불어넣는 목회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어떻게 툭하면 무슨 라이트니, 무슨 단체니 하는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모여 앉아 한국의 역사는 임정 90년이 아니라 건국 60년에 더 큰 정통성이 있으니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는 전교조를 반드시 때려잡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일까. 국회에서 달랑 5석밖에 갖고 있지 못하는 민주노동당이 친북좌익세력이니 제일 먼저 척결해야 한다는 소리를 어떻게 하는 것일까. 지금 어떻게 그런 일들이 서민들이 생계자금을 대출하지 못해 은행 창구에서 발을 동동구르는 이 어려운 시국에서 가장 화급한 일이 되는 것일까. 그런 사람들은 과연 시중에서 반토막 라면을 한번 사본 적이 있는 사람들일까.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이고 누구를 위한 경제정책인 것일까.

라면 하나를 사보니 라면의 정치경제학이 읽혀졌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라면을 끓여 먹었으면 싶다. 라면 하나도 맘편하게 먹을 수 없는 세상이다. 원 이런 젠장할.
(*이 글은 연예전문지 <프리미어> 최근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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