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지금까지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앞으로 한국은행은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새로 돈을 찍어낼 예정이다. 발권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시장이 안정될 것이라는 장담을 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다. 이에 더해 확정된 내년 예산안에 따라 국민의 혈세가 2조 원 이상 은행권에 투입될 예정이다.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새로 돈을 찍어대는 상황까지 온 이유는 간단하다. 시중은행·저축은행 등 금융권이 겁에 질려 시중에 돈을 뿌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은은 기준금리 인하로 기업대출을 독려하고 있지만, 은행은 꿈쩍도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자금줄이 마른 산업현장에서는 기계가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 위기가 위기를 낳는 셈이다. 12일 한은이 발표한 '2009년 경제전망'에 따르면 내년 설비투자 증가율은 -3.8%로 올해(-0.2%)보다 사정이 더 나빠질 것으로 보인다. 내년 내수와 수출이 올해보다 더 나빠지기 때문에 은행이 시중에 돈을 풀지 않는다면 기업 줄도산으로 시작되는 암울한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와 한은은 '은행이 돈만 풀 수 있다면' 추락 속도를 어느 정도 늦추는 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유인할 경로는 다음과 같다. 먼저 한은은 돈을 찍어내 환매조건부(RP) 방식으로 금융권에 빌려준다. 이 돈으로 금융권은 채권시장에 자금을 투입해 기업의 숨통을 틔운다. 다른 경로는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국민 세금을 들여 국가기관이 직접 유동성 공급에 나선다.
투입된 자금이 은행-기업 사이의 '돈맥경화'를 제대로 해소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이와 같은 대규모 조치에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예고된 유동성 폭발의 후폭풍이 거세게 불 것으로 전망된다.
한은은 벼랑 끝에 몰린 화수분
한은은 그 동안 유동성 경색을 뚫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기준금리는 연달아 큰 폭으로 내려 결국 지난 금통위에서는 3.0%까지 낮췄다. 이에 더해 시중은행이 한은에 예치한 지급준비예치금에 대한 이자 약 5000억 원을 은행에 한꺼번에 주겠다고 밝혔다.
또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저리로 빌려주는 총액한도대출을 2조5000억 원 늘렸다. 이에 더해 지난 10월 24일에는 증시 회복을 위해 2조 원을 환매조건부(RP) 매입 방식으로 증권사와 자산운용사에 풀었다.
하지만 이들 방식은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기준금리가 내려갔지만 시장성이 있는 국고채만 반응했을 뿐, 은행채 등 여타 채권금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은행은 지급준비예치금 이자를 현금으로 손에 쥐어도 여전히 '추가 대책을 내놔라' 요구만 하고 있다.
한은이 추가 대책을 마련한 이유다. 15일 현재 확정된 지원금액만 9조 원에 달한다.
당장 정부가 조성을 주도한 '채권시장안정펀드'에 지원할 자금이 총 5조 원이다. 이번 달 중순부터 가동이 시작되는 채권시장안정펀드는 총 10조 원 규모의 '펀드 오브 펀즈(하부 펀드를 가진 펀드)'로 채권시장 금리를 낮추기 위해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과 시중 금융권이 자산을 마련해 설립된 특수 목적 기금이다.
한은은 법적 문제로 직접 펀드에 참여하지는 않고 은행채를 RP 매입 방식으로 사들여 시중은행의 펀드 참여를 측면 지원한다. 당초 국고채나 통안증권 매입 등이 방법으로 거론됐지만 시장성이 부족한 은행채를 사달라는 은행권의 요청을 한은이 받아들였다.
15일 오전 한은은 금융기관의 채안펀드 출자액에 대한 지원예정액의 절반인 2조5000억 원을 RP를 매입해주며 시장에 풀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오는 16일에는 단기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2조 원을 추가로 푼다. 역시 91일물 RP매입방식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이 자금을 지원받은 금융기관은 전액 기간 내에 CD나 CP 등 단기자금을 매입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19일에는 역시 2조 원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한다. 28일짜리 RP로 연말 자금사정이 어려운 금융기관을 지원하기 위한 돈이다.
사실상 실물시장의 유동성 안정을 위해 한은이 새 돈 9조 원을 찍어 직접 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건전성 지표인 BIS비율 높이기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은행권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돌발변수는 산적해 있다. 내년 11월이면 은행채·공사채 등이 공개시장조작대상 증권에서 제외된다. 금융통화위원회가 은행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기한을 추가 연장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돈을 더 풀어라'는 세간의 요구는 앞으로 더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이미 '은행이 스스로 자본 확충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를 전제로 은행권 추가 지원에 나설 수 있다는 바람몰이를 시작했다. 거론되는 방안 중 하나가 한은이 국책은행에 돈을 빌려준 후 이 돈을 시중은행 출자에 쓰자는 것이다. 한은보고 '돈을 더 찍어라'는 여론의 압박이 이미 서서히 시작된 상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런 요구들이 빗발쳐도 한은이 운신할 폭이 상당히 좁아졌다는 데 있다. 이성태 총재 스스로 말하듯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한 유동성 지원은 상황이 개선된 후 유동성 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래를 저당 잡힌 정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친다면 한은이 이를 이겨내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이미 한은은 초유의 '유동성 함정'이라는 단어가 거론될 정도로 기준금리를 낮춰 놓았다. 앞으로도 사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금리의 추가 인하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발권력 카드를 또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다. 국내 금융시장의 '화수분'이 벼랑 끝으로 몰린 셈이다.
▲지난 11일 열린 금통위에서 한은은 한꺼번에 기준금리 1%포인트를 낮췄다. '찔끔찔끔' 내려서는 도저히 시장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고 판단한 결과다. ⓒ연합뉴스 |
금융시장 지원 위한 국민 돈 130조 넘어
한은의 지원에 맞춰 내년에는 국민 세금이 대규모로 금융권에 투하된다. 정부 산하 공기업을 통해 지원되는 것으로 국회 동의를 따로 거치지는 않지만, 성격으로 봐서는 사실상 은행권에 공적자금 투입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13일 새벽 한나라당에 의해 강행 통과된 새해예산안을 살펴보면 금융시장 안정화를 위해 확정된 예산안은 총 2조1000억 원이다.
먼저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 중소·수출기업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유도하기 위해 1조7000억 원이 지원된다. 이에 더해 자산관리공사(캠코)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데 새로 4000억 원이 더 투입된다. 국책은행이 직접 실물부문 유동성 지원에 나서는 한편, 금융권의 부실채권을 매입해 대출 여력을 높여주자는 것이다.
금융권에 돈을 푸는 것은 아니지만 1조6000억 원이 넘는 세금이 기업의 유동성 고갈을 막기 위해 투입된다.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신용보증기관의 새 출연금을 올해 2800억 원에서 내년 1조1600억 원으로 대폭 늘렸다. 벤처기업의 투자를 늘리기 위해 모태펀드에 대한 출자액은 당초 1150억 원에서 1450억 원으로 확대 책정됐다. 수출보험기금 출연금은 올해의 거의 열 배에 달하는 3327억 원으로 확정됐다. 은행권 지원금을 포함할 경우 내년 세금 중 3조7400여억 원이 기업 지원을 목적으로 짜인 셈이다.
이들 돈은 현재까지 집행된, 혹은 집행이 확정된 돈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다. 정부가 지난 두 달 사이에 내놓은 금융지원책 규모만 130조 원을 훌쩍 넘는다. 여기에는 약 5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화도 포함돼 있다.
은행의 외화차입 지급보증, 미국과 통화교환계약 체결, 중소기업 대출한도 확대, 기준금리인하, 재정지출 확대, 세금감면 등 모든 정책수단이 동원되는 상태다.
▲1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한구 위원장이 2009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뉴시스 |
그나마 이들만으로도 태부족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다. 이미 학계와 일부 정치권에서는 내년 초 추경예산을 짜기 위한 논의가 곧바로 진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재정적자 규모를 더 늘려서라도 과감히 추경예산을 편성해 실물시장에 돈을 쏟아 부으라는 얘기다.
당장 한은이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내린 지난 11일 류근찬 자유선진당 의원은 "당초 4% 성장률에 맞춰 예산을 짜 놨는데 2%대로 떨어진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며 "경제성장률 1%포인트를 끌어올리려면 28조에서 30조 원의 재정이 필요하다. 2%포인트를 올린다면 5, 60조 원이 필요하다. 내년 초에 추경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미 올해 말 일부 기업부문과 저축은행 부문에는 캠코 등을 통해 정부 돈이 투입됐다. 지난 10월 정부는 국책은행의 중기 공적자금 지원액 증가, 신용보증기관의 보증규모 증가 등을 통해 8조 원이 넘는 돈을 실물 부문에 집어넣기로 한 상태다.
이 규모는 내년 들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많은 민간 금융권의 전문가들은 내년 초 시중은행에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될 것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다.
또 '급한 불' 끄는데 그치려나
이를 위한 정부돈은 국채발행 등을 통해 마련된다. 국가 채무가 심화한다는 소리다. 대우조선해양 등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기업을 매각해 이 돈을 갚듯 정부가 재정 부담, 곧 국민 세금 부담을 통해 떠받친 경제가 살아난다면 그 과실은 특정인이 따먹는다.
역시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만에 하나 정부가 대규모 자금을 투입한 부문이 무너져버린다면 최악의 사태가 온다. 정부는 '혈세를 퍼붓고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으며 국민은 세금을 갖다 바쳤음에도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 암울한 상황을 더 인내해야만 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세금투입이라는 응급처치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불은 껐지만 구조조정이 지연된 데 따른 후폭풍을 언젠가는 감내해야 한다는 데 있다.
지금 저축은행권 부실화에는 무리한 대출경쟁을 넘어 지난 외환위기 때 제대로 된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아 경쟁이 과열될 수밖에 없었다는 근본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 2000년대 초 벤처 버블의 후폭풍은 두고두고 한국 경제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정부 부담 증가는 냉정하게 본다면 한은의 발권력 동원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저당 잡힌 정책이다.
은행들의 부실 경영의 책임과 재발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이 이번에는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1998년 외환위기 직후에도 은행에 공적자금 87조 원이 투입됐지만, 크게 달라진 것 없이 10년 만에 또다시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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