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는 11일 삼성경제연구소가 주최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한국의 정책 대응'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석해 이와 같은 의견을 밝혔다. 그는 또 정부가 재정지출 체계 개편과 추경예산 투입을 지금 당장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내년 초 다시금 촛불시위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적자금 투입 안하면 촛불시위 또 맞을 것"
전주성 교수는 "불안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금융권이 가장 흔들리고 있으며 특히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은 문제가 심각하다"며 "당장 20조 원 규모의 공적자금을 조성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축은행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이 흘러들어간 164개 사업장에 자산관리공사(PF)가 총 1조30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투하하는, 사실상 '유사 공적자금' 투입 방안으로는 불안한 저축은행권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전 교수는 주장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대규모 자금 투하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그는 밝혔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 ⓒ삼성경제연구소 제공 |
전 교수는 또 추가경정예산을 지금 즉시 짜라고 요구했다. 한국 경제의 가장 취약한 고리 중 하나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예산 마련이 시급하다는 말이다.
그는 또 "3주 전에 한 학술회에 참석해 '지금의 정부 대응이 이대로 이어진다면 내년 초에 세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 세 가지는 추경예산 편성과 대규모 공적자금 투입, 그리고 대규모 촛불시위"라고 밝혔다.
정부가 보이지 않는다?
전 교수가 이처럼 강력한 요구를 한 까닭은 내년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인 침체가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당장 세계은행(World Bank)은 내년 세계 경제성장률이 1%도 못 미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다.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데다 내수 동력이 꺼져버린 한국은 진퇴양난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처럼 내년 경제전망이 심각한데도 정부가 주력하는 정책을 보면 현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지적이 이날 심포지엄에서 나왔다.
전 교수와 함께 토론자로 나선 정갑영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지금 정부는 있는데 정부 정책을 찾아볼 수 없다"고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꼬집으며 당장 급한 예산안 개편 등에는 제대로 신경쓰지 않고 정치적 공방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예산안을 둘러싼 잡음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모양새다. 지난 1일 오전 국회 예산결산특위에서 열린 예산안조정소위에 참석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부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뉴시스 |
정 교수는 부동산 문제와 함께 정부가 초점을 두는 또 다른 '심각하지 않은 문제'로 대운하 문제를 들었다. 이미 사회적으로 '반대' 입장이 분명해진 정책에 왜 자꾸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냐고 정 교수는 비판했다.
정 교수는 또 정부가 자꾸 말을 뒤집어 정책의 일관성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가 '기업을 도산시키지 말라'는 신호를 시장에 주면서도 은행에는 '대출을 늘리라'고 요구한다"며 "은행 역시 빠듯한 살림을 사는 기업인데 도산해도 된다는 뜻인지 시장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을 지원하려면 정부가 갖고 있는 많은 국책은행 돈으로 지원하라"고 말했다.
전주성 교수 역시 "정부가 문제가 터질 때마다 이런저런 정책을 건드려만 보면서 제대로 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삼성硏 "긴급구호펀드 만들자"
정부에 대한 주문은 이밖에도 끊임없이 쏟아졌다. 개론은 다양했지만 큰 줄기는 '과감한 재정적자 편성'이라는 데서 같았다.
재정부문 대안을 발표한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공공정책실장은 "예상되는 성장률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국내총생산(GDP)의 78.5%를 차지하는 내수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현재 예상되는 내년 내수성장률은 1.7%에 그친다"며 "내수가 최소 0.5~1%포인트는 더 성장해야만 정부가 말하는 3%대 경제성장률 달성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공공정책실장은 강력한 재정적자 정책을 주문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그 일환으로 '한국판 뉴딜'을 거론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제공 |
홍 실장은 성장률 재고를 위해 추가적으로 필요한 재정지출 규모는 최소 9조5000억 원에서 최대 30조2000억 원이라고 밝혔다. 이에 더해 필요하다면 총 229조 원 규모의 국민연금도 재원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는 작년 말 현재 33.4%로 OECD 평균인 78.4%보다 훨씬 낮아 충분히 재정적자를 감당할 수 있다. 국민연금 역시 이미 지난 외환위기 때 자산의 71.1%를 공공부문에 투입해본 경험이 있다"며 "이렇게 늘린 재정을 중·저소득층 지원과 '한국형 뉴딜' 정책, 그린에너지 등 신성장동력, 감세에 투자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다 구체적으로 홍 실장은 정부가 50%를 출자하고 민간의 기부를 더한 '긴급구호펀드(가칭)'를 만들어 차상위계층까지 도와야 한다고 밝혔다. 또 부족한 사회복지를 충족시키는 방안으로 간병, 보육 등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창출하고 영세사업자 훈련수당도 인상시키자고 했다. 한편 감세안의 경우 한발 나아가 더 즉각적인 효과가 나도록 세금환급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고 밝혔다.
"감세 큰 효과 없어…재정지출 늘리는 게 능사 아니다"
전주성 교수는 "감세 효과는 매우 장기적으로 나타난다. 당장 큰 효과가 없다"며 "여론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묻혔지만 민주당이 제안한 한시적인 부가가치세 3~4% 감면은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밝혔다.
세금환급은 미국의 경우 환급금 1달러 당 소비로 유입된 부분은 20센트에 불과했다며 큰 효과를 얻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또 종부세 인하 역시 당장 급한 게 아니므로 서두를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전 교수는 재정지출 역시 무조건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국은 재정확대 경험이 별로 없는 데다 예산안을 확대해서 짠다 하더라도 지출 전달체계가 불투명해 재정이 적시에 투입돼 제대로 기능할 확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다.
나아가 한국의 재정적자 상황이 선진국에 비해 건전하다는 통계도 무조건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나왔다. OECD 국가 간 편차가 매우 커 평균치 78.4%라는 수치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데다 다른 나라에 비해 복지수준이 매우 낮고 통일비용까지 감안해야 하는 국내 사정상 지금 수준도 낮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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