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급준비금은 은행이 수신한 예금의 일부를 한은에 예치하도록 한 제도다. 은행으로서는 그만큼 대출로 굴릴 돈이 줄어들지만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예금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론적으로는 한은이 지준율을 인하하면 그만큼 은행은 대출을 늘릴 수 있어 시중에 통화량이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지준율 인하는 좀처럼 써서는 안 될 카드라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한번 내린 지준율을 다시 올리기 힘들어 앞으로 유동성이 넘쳐날 때 이를 통제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지금의 유동성 문제는 돈의 양 자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용경색이 근본원인이기 때문에 현 상황에 맞는 정부 정책이 나와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결국 근본적인 해법은 정부의 빠른 구조조정밖에 없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제대로' 단행하지 않는 한 은행은 어떤 유동성 공급에도 실물부문에 돈을 풀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정부의 태도로 미뤄보면 이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임태희 "지준율 확 낮춰라"
현재까지 유동성 공급정책은 제법 많이 나왔다. 한은이 팔짱만 끼고 '돈맥경화'를 쳐다만 본 게 아니라는 소리다. 한은은 지난달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4.0%로 끌어내린데 이어 지난 3일에는 임시금통위까지 열어 지준부리 제도를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더해 주택금융공사의 채권을 환매조건부(RP) 방식으로 매매하는 공개 시장조작 대상에 포함시키겠다는 안도 내놨다.
한은이 위와 같은 정책을 편 까닭은 은행의 실물경제 권역에 대한 대출 유도에 나름의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지준부리 제도가 이행되면 이제까지 한은에 예치금을 넣어놓고도 한 푼의 이자를 못 받던 은행권에 일거에 5000억 원가량의 돈이 흘러들어간다. 그만큼 은행은 증자 효과를 얻어 시중에 돈을 풀 여유가 늘어난다. BIS비율 관리에 들어간 은행이지만 증자분만큼은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BIS비율은 은행 자기자본을 (대출이 포함된) 위험가중자산으로 나눈 값이다. 자본이 늘어나면 비율이 개선되고 대출이 늘어나면 나빠진다. 금융감독원은 시중은행에 BIS비율을 10% 이상을 유지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주택금융공사 채권을 공개시장조작 대상 채권에 포함시킨 것 역시 은행의 BIS비율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은이 공개시장조작을 위해 이를 매입하면 주택금융공사가 이 자금으로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을 사들여 유동화증권으로 시중에 유통시킬 수 있다. 또한 주택담보대출 자산을 주택금융공사에 맡긴 은행은 대출이 줄어든 만큼 BIS비율이 개선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BIS비율 개선분만큼 추가로 대출을 늘릴 영역이 발생하는 셈이다. 한은은 주택금융공사채 매입에 따른 효과로 생기는 시중은행의 여신 여력 확대 규모가 6조3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은의 이와 같은 정책은 시중의 유동성 개선에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실제로 중소기업이나 건설·해운 등 일부 업종을 중심으로 돈줄이 말라버렸다는 아우성이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고 있다.
여당의 추가 유동성 공급 정책 주문은 이를 바탕으로 나왔다. 9일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금처럼 시중에 돈이 안 돌 때는 지준율을 확 낮춰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당 지도부의 발언이므로 상당한 무게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주요 기업 부도사태는 막아야 한다'는 데서 정부와 공감대를 형성한 한나라당 차원의 바람이 드러난 것이라고도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지난달 23일 열린 경제상황 점검회의에서 한승수 국무총리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부터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한승수 국무총리,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뉴시스 |
"금리 내려서 효과 있었나?"
일단 은행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지준율이 낮아지면 그만큼 보유할 수 있는 자산이 늘어나게 되는데 어떤 은행이 마다하겠느냐는 말이다. 당장 시장 일각에서는 "이번 금통위에서 한은이 지준율 인하를 결정할 가능성이 있다더라"는 식의 소문이 오간다.
이해당사자인 은행뿐만 아니라 실제 전문가 집단에서도 지준율 인하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지금은 한은이 쓸 수 있는 카드는 한꺼번에 모두 쏟아내야 하는 시점이라는 말이다.
박종연 우리투자증권 책임연구원은 "한은의 통화정책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경로는 크게 네 가지다. 금리와 자산가격, 신용, 외환경로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금리인하로 이들 경로가 제대로 뚫렸나"고 반문하며 "지준율 인하 효과가 생각만큼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효과의 크고 작음을 따질 때가 아니다. '한꺼번에' 한은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시장에 쏟아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이 실제로는 돈이 부족하지 않은데 꾀를 부리고 있다"는 한은의 지적에 대해서도 박 연구원은 문제가 있다는 시각을 드러냈다. 실제로 은행이 한은에 예치하는 자금이 10조 원이 넘지만 이는 단기자금일 뿐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앞날이 불투명한 상황에서는 이 돈을 장기대출로 굴릴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은행이 꼼수를 쓰고 있다"
시장과 정치권의 이러한 비판에도 한은이 쉽게 지준율 인하를 실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한은은 은행에 대한 불신을 갖고 있다. 지난 3일 이주열 한은 부총재보의 말에서 드러난다.
그는 "지준율을 한번 내리면 다시 올리기 어렵다는 것을 은행이 알고 있기 때문에 (지준율 인하)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이 위기를 핑계로 꼼수를 쓰고 있다는 말이다.
▲이번주 금통위에서 얼마나 큰 폭의 금리인하가 결정될지가 시장의 관심사다. 일각에서는 지준율 인하가 발표될 수 있다는 희망섞인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뉴시스 |
학계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준율 조절 등의 유동성 공급방식을 논한다고 지금의 자금경색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단 주요 원인은 지준율 조절정책 자체가 좀처럼 한은에서 꺼내들지 않는 극단적인 수단인 데다 성공확률도 그리 높지 않다는 데 있다.
가장 최근의 지준율 조절 사례는 2년 전이다. 지난 2006년 4월 이성태 총재가 취임 직후 시중의 과도한 유동성을 잡기 위한 조치로 콜금리 인상에 이어 지준율 인상을 단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중의 유동성은 계속해서 팽창했다. 당시는 부동산가격 폭등이 절정에 달했던 때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지준율을 내리면 은행의 통화승수가 올라감에 따라 시중에 유동성 공급이 증가될 수 있다. 하지만 효과가 나타나는 시간이 비교적 길고 은행이 이 돈을 기꺼이 대출로 돌릴지가 명확하지 않다"며 "지금은 장기간에 걸쳐 체력을 보충하는 보약(지준율 인하)보다 수술로 필요한 부분에만 확실한 처방을 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구조조정…"정부, 결단을 내려라"
수술, 곧 정답은 구조조정이라는 게 전 교수의 말이다. 은행의 대출기피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도 옥석을 제대로 가려내야한다는 뜻이다. 대출을 해줘도 위험도가 낮은 곳과 높은 곳이 가려지면 당연히 은행은 돈만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대출에 나선다는 뜻이다. 예대마진은 국내은행의 주요 수입원이다.
나아가 지준율 인하 공방 자체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한가한 소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 통화정책이 큰 효과를 못 보는 게 명확한 상황에서 적극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되지 않은 어떤 정책도 효과를 보기 힘들다는 뜻이다.
전 교수는 "상처가 났으면 찢은 다음 꿰매고 항생제를 투여해야 한다. 구조조정을 당장 정부가 주도하라는 말"이라며 "지금은 지준율 인하나 기준금리 인하 등 한은만 쳐다보고 있을 때가 이미 지났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학계의 요청과는 달리 정부는 여전히 말로만 구조조정을 실시하겠다고 할 뿐,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건설업체 대주단협약 추진과정에서 드러나듯 '상위 모든 업체는 무조건 살린다'는 듯한 모습을 강하게 내비친다.
정부가 기존 정책 목표를 일단 후순위로 미루라는 주문이 나온다. 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라는 충고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아무리 유동성을 공급해봐야 실물 기업의 옥석 가리기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정책이 의도한 효과를 얻을 수 없다"며 "현 위기에 대한 대응책과 국정 어젠다가 충돌한다면 국정 어젠다를 잠시 후순위로 두는 게 옳다. 지금은 정부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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