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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에 '히틀러 라디오'가 웬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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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에 '히틀러 라디오'가 웬 말?"

[홍성태의 '세상 읽기'] 히틀러와 라디오

이명박 대통령이 한 달에 한 번씩 라디오를 통해 국민에게 연설을 하겠다고 한다. 1930년대 대공황 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절망에 빠진 미국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노변담화'라는 이름으로 정기적인 라디오 방송을 했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 방송을 흉내 내겠다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 한국은 1930년대 대공황기의 미국과 같은 상태에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대응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다. 1930년대 미국에서도 배울 것이 있기는 하겠지만, 60년 전의 미국과 지금의 한국은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예컨대 60년 전의 미국보다 지금의 한국이 훨씬 더 개방적이고 복잡하다. 더욱이 1930년대 미국에서 라디오는 최첨단 방송매체였지만, 지금 한국에서 라디오는 <라디오스타>같은 영화가 보여주듯이 오래 전에 한물간 방송 매체이다. 서구에서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여요'라는 노래가 나온 것은 이미 거의 30년 전의 일이다. 대통령이 인터넷 시대에 라디오 연설로 국민에게 '희망의 미래'를 얘기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저 '절망의 미래'를 더욱 더 강하게 예감하게 할뿐이다. 정말 위기가 공황으로 폭발할 모양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고 인터넷을 규제한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이미 한국방송(KBS) 뉴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뉴스는 아예 '땡박 뉴스'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고, 각종 심층 보도 프로그램은 폐지되거나 그저 선전 방송이 되고 말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정기적으로 방송을 할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나름대로 허를 찌른 셈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대통령이 나서야 할 정도로 위기가 깊어진 것인가, 아니면 대통령이 DJ 노릇을 할 정도로 한가한 것인가? 아무래도 전자이리라. 위기가 이미 깊디깊고,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욱 더 깊으니,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리라. 그러나 대통령의 정기적 라디오 방송은 불신과 위기를 더욱 깊게 하고 말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배워야 할 것은 라디오 방송 자체가 아니다. 사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야말로 미국의 진정한 구세주였다. 그러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초래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국의 토건 세력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고용을 늘리기 위해 대규모 토건 사업을 벌인 것만 크게 강조한다. 그러나 토건 국가 한국과 달리 그것은 토건 세력의 영구적 번영이 아니라 전체 경제의 일시적 활력을 위한 조치로 취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적극적 개입 정책으로 기업의 폐해를 시정하고 노동자와 실업자의 권익을 향상해서 이른바 '풍요 사회'로 불리는 '현대 미국'을 형성한 장본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배워야 할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올바른 정책'이다.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계획, '경인운하' 건설 사업, 한탄강댐 건설 사업,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수도권 집중 완화, 환경 규제 완화, 촛불 집회 탄압, 시민단체 탄압, 뉴라이트 옹호, 유모차 주부 수사, 종합부동산세 인하, 국제중학교 설립, 교과서 개악, 역사 개악, 대북 대립 정책, 금산분리 완화, 방송 장악, 인터넷 장악, 강만수 옹호, 어청수 옹호, 기독교 숭앙, 불교 차별 등의 '잘못된 정책'을 끝도 없이 양산하면서 아무리 '노변담화'를 해 봤자 위기는 더욱 더 깊어질 뿐이다. '노변담화'는 '올바른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잘못된 정책'을 강행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라디오인가? 텔레비전도 있고, 인터넷도 있지 않은가? 라디오는 소리만 전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수신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매체가 바로 라디오인 것이다. 발신자의 편에서도 외모나 논리를 떠나서 가장 일방적으로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매체가 라디오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라디오는 오래 전부터 '독재의 매체'로 이용되었다. 사실 라디오를 아주 잘 활용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체제도 '미국형 파시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히틀러와 나치즘이다. 다음은 히틀러의 선전상으로 악명을 떨쳤던 괴벨스 평전에서 인용한 것이다(<제3제국과 선전>, 로저 만벨·하인리히 프렌켈(1960) 지음, 김진욱 옮김(1988), 자유문학사).
  
  당시의 나치에게 있어서의 주요한 선전의 수단은, 실은 영화가 아니라 출판과 라디오였다. (…) 괴벨스는 선전부가 만들어지자마자 방송의 모든 기구를 국가 목적을 위해 통제하고, 독일 방송회사를 개편하여 선전부의 감독 아래 두었다. (107쪽)
  
  괴벨스는 "우리는 라디오에 의해 모반인들의 영혼을 파괴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 그의 부하 중의 한 명은 더욱 신랄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방송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전의 무기이다. 선전이란 정신의 온 영역에서의 싸움-정신의 창조와 파괴, 육성과 절멸, 재건과 해체의 영위-을 말한다. 우리의 선전은 독일의 민족과 피와 국가에 의해 결정된다". (108쪽)
  
  괴벨스는 대중이 라디오를 듣는 습관을 길들이는 일을 우연에 맡겨 두지는 않았다. 그는 전국의 각 지방에 방송 감독소의 시스템을 만들어두고, 끊임없이 대중과 접촉하고, 팜플릿을 내며, 중요한 방송은 미리 알려주고, 공공장소에 설치한 확성기를 통해 청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108쪽)

  
  사실 진작부터 히틀러와 괴벨스의 관계가 지금 이곳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명박식 '노변담화'는 이 비판을 사실로 확인해주는 것이 아닐까? 물론 라디오를 이용해서 '잘못된 정책'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고 순응하도록 하겠다는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지금 이 나라는 대학 진학율이 80%를 넘고 초고속인터넷 보급율이 95%를 넘는 세계 최고의 지식사회, 정보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일방향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겠다는 것은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이명박 대통령은 정말 자기의 말이 국민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아서 국민들이 자기를 싫어하고 불신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조·중·동 중독증'을 치료받고 인터넷을 배워서 국민들의 뜻을 살핀다면, 사실을 아주 쉽게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더 근본적인 것은 발상 자체의 문제이다. 어떻게 양방향 인터넷 시대에 일방향 라디오로 국민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정말 너무나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닉슨이 텔레비전 연설로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가 실패한 것도 이미 35년 전이다. 미국과 한국이 일방향 동영상 텔레비전 시대를 지나 양방향 동영상 인터넷 시대로 접어든 것도 어느새 15년이 넘는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방향과 양방향의 차이이다. 이명박 세력은 이 점에 대해 정말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 차이는 바로 민주성의 차이이다. 라디오라는 단방향 음성매체로 국민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겠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 히틀러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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