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나 금융권 애널리스트 등 경제분야 전문가들에게 거시경제 전망을 묻는 것만큼 힘 빠지는 일이 없다. "원자재 가격이 변수고, 가계부채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될 수 있고, 기업 신규투자 액수가 줄어든다는 것이 안 좋은 신호고…." 대답이 대체로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가 "정부 정책이 시장에 신뢰를 얻어야 긍정적"이라는 얘기다. 이 말이 나올 정도면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는 게 보통의 수순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고 중요한 말이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낯설게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새삼스럽게 와 닿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전문가들의 착한 대답에 '이거다'하고 손뼉을 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뻔한 얘기가 실제로는 전혀 이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반드시 시장에 적용돼야 하기에 구태의연한 레토릭도 기삿거리로서 생명력을 얻는다.
다시 "정부가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말로 돌아가자. 이 말은 요즘 경제부문 보도에 신선한 재료다. 정부가 시장의 신뢰를 전혀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느껴지는 금융권 사람들의 정부에 대한 반감과 불신은 정부와 이념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좌파'들의 그것보다 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얘기를 나눈 한 증권사 관계자는 "요즘 강만수(장관)를 칭찬하는 사람은 주위에게 욕을 얻어먹을 정도"라고 말했다.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은 단어만 골라 쓰는 게 직업적 특징인 애널리스트 세계에서도 이런 기운은 감지된다. 한 애널리스트는 "정부가 하는 꼴을 보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예 모르는 것 같다"라고까지 표현했다. 보수적인 금융권 사람들이 구사하는 언어를 순화해서 사용한 게 이 정도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잠잠하던 외환시장에 불똥을 던지고 난 후 '선제적 대응'을 하겠다면서 시장이 미쳐 날뛴 다음에 들어가는 게 정부의 속도"라고 냉소하기도 했다.
시장 참여자들의 심경이 이러니 정부가 내놓은 정책에 시장이 곱게 따를 리 없다. 지난 2일 금융시장의 출렁임은 단적인 증거다.
이날 시장에 새로운 악재를 찾기는 어려웠다. 새벽에는 미국에서 '구제금융안 상원 압도적 통과'라는 호재가 전해졌다. 정부는 전날에 이어 이날도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달러화 경색이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에서 이는 호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환율은 '갑자기' 폭등해 1223원50전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2003년 이후 5년 5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코스피 지수는 전날에 이어 이날도 20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시장이 정부의 말에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이다.
시장은 이날 정부의 '유동성 공급' 소식에서 '저러다 외환 곳간이 빌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더 크게 가졌다. 미국의 구제금융 법안이 통과된다 해도 정부가 혼란에 빠진 국내 금융시장을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했다. 그래서 시장이 단기 호재에도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물론 지금 시장의 변동성이 워낙 커 '이 모든 게 다 OO정부 때문이다'라는 철지난 농담으로 일관하기는 무리다. 미국에서 날아오는 외재변수의 파괴력도 워낙 강력하다.
그렇지만 모든 레토릭과 정책 수행이 정반대인 정부가 '또 다른 불안 요소'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게 시장의 생각이다. 시장의 불신이 이어진다면 정부가 내놓는 어떤 정책도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정부가 시장의 신뢰를 어떻게 얻어야 하나? '중소기업이 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했으면 그렇게 하면 되고, '국민의 세금 부담을 줄이겠다'고 말했으면 역시 그대로하면 된다. 모럴 해저드 걱정은 중소기업에만 하지 말고 은행에도 해주고, 물가 안정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또 다른 거품만들기는 하지 않으면 족하다.
다만, 정부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부분도 있는 듯 싶다. 이제는 모든 언론이 '식상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장관 인사 교체가 그것이다. 시장이 가장 불안해하는 분이 지나치게 정책 발표 때 얼굴을 자주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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