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통과될지 알았습니다. 초대형 금융위기가 닥친 상황이니까 일단 물불 안 가리고 7000억 달러 구제금융을 쏟아붓는 데 동의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미국 하원은 구제금융법안을 부결시켰습니다.
미 하원의 부결사태가 세계금융에, 그리고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무딘 필력과 짧은 생각으로 논할 내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적 측면만 보려고 합니다. 미국의 대통령과 양당의 대선후보가 입을 모아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던 구제금융법안을 부결시킨 하원 의원들의 사고를 곁눈질으로나마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하원 의원들이 선거를 의식해 반대표를 던졌다고 분석합니다. 대선, 그리고 의회선거를 앞둔 상태에서 미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구제금융법안에 선뜻 찬성표를 던질 수 없었다는 해석입니다. 부결표가 야당인 민주당(95표)보다 여당인 공화당(133표)에서 훨씬 많이 나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해석법에 따르면 205표에 이르는 찬성표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이라고 선거나 국민여론과 담 쌓고 살 리는 없을 테니까요.
개인적으론 다른 해석에 눈길이 갑니다. 공화당에서 부결표가 엄청 많이 나온 이유를 소신에서 찾는 해석입니다. 평소 정부의 시장개입에 부정적이던 공화당 의원들이 마구잡이 구제금융에 반기를 들었다는 분석입니다.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공화당 의원들의 소신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신자유주의의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신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정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논외로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선 정치적 측면만 거론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냥 그들의 소신을 소신 그 자체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공화당 의원들의 소신 투표를 정치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어떤 평가가 나올까요?
거듭 말하지만 공화당은 여당입니다. 부시 행정부의 공과를 공유하는 정당입니다. 그런 정당에 소속된 의원들이 부시 행정부에 치명타를 안길 한 표를 행사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거듭된 호소와 요청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꺾지 않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1인 헌법기관' '걸어다니는 헌법기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것입니다.
시야를 약간 넓히면 이런 평가는 더욱 강화됩니다. 부시 대통령은 물론 양당 대선후보와 지도부의 호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 투표'를 한 의원들이 공화당 133명, 민주당 95명입니다. 애당초 '당론 투표'는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일사불란'은 명함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많은 의원들이 '자유 투표'를 했습니다.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주장을 하느니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이미경 의원의 사례입니다.
이미경 의원은 지금 민주당 소속이지만 애초에는 한나라당 소속이었습니다. 이 의원이 당적을 옮기게 된 결정적 계기는 '소신 투표' 였습니다.
1999년 국회에 '동티모르 파병동의안'이 제출됩니다. 한나라당은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을 의식해 파병하려 한다며 반대했고 표결이 예정됐던 본회의장에서 모든 의원을 철수시킵니다. 하지만 이미경 의원은 홀로 남아 파병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집니다. 한나라당의 입장에 반기를 든 것이죠. 우리 국군이 동티모르에서의 민간인 살상을 막고 민주적 선거를 돕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게 당시 이미경 의원의 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경 의원은 한나라당을 떠납니다.
이 사례가 웅변합니다. 우리 국회의사당에서 이뤄지는 표결의 상당부분은 '당론 투표'입니다. 중대 사안의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표결에 앞서 당론을 정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해도 본회의장에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의 의원이 당론에 충실히 따릅니다.
물론 자신의 소신을 내세워 당론을 거부한 사례가, 그런 의원들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보다 마이크 앞에서는 소신을 부르짖다가 본회의장에 가선 '무기명 투표'에 기대 당론을 좇은 사례, 그런 의원들이 더 많습니다.
이게 한국 정치의 현실입니다. 소신에 따른 반대표를 '반란표'로 규정하는 게 한국 정치의 실상입니다.
반박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당론 투표를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 당내 의견수렴을 충분히 거쳐 결정된 당론이라면 따르는 게 당인의 도리라는 점이 반박 논리가 될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럼 '1인 헌법기관'이란 위상은 뭐냐는 반문이 튀어나오지만 꾹 참고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경우는 어떨까요? 한나라당의 경우입니다.
논란이 적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종합부동산세 완화안을 놓고 당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두 차례에 걸쳐 의원총회를 열고서도 당론을 정하지 못해 최고위원회의로 결정권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어제,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는 정부원안을 그대로 수용하는 당론을 정했습니다. 그러면서 국회 법률 심의과정에서 개별의원들의 수정의견을 함께 심의하기로 했습니다.
아주 희한한 풍경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뒤집힌 모습입니다.
당론을 정해놓고 수정 여지를 남기는 행태를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차후 수정 여지를 남길 만큼 당내 의견 수렴이 쉽지 않다면 서둘러 당론을 정할 일이 아닙니다. 당론을 쉬 정할 수 없다면 의원들의 자유투표에 맡기는 게 순리입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세상이 다 압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 또는 위세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그 위세에 눌려 일단 따르는 모습을 연출하다가 행여 헌법재판소가 종부세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려주기라도 한다면 그에 기대 소신을 조금이라도 투영시킬 요량입니다.
이제 갈무리용 질문을 던질 때가 됐습니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미국의 여당 의원들과 한국의 여당 의원들의 행태를 어떻게 비교 평가해야 할까요? 180도 다르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이하게 나타나는 행태를 단지 시기와 상황 요인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미국의 여당 의원들과 공존하는 대통령은 집권 말기의 레임덕에 빠졌고 한국의 여당 의원들이 따르는 대통령은 집권 초기의 위풍당당함을 과시하기 때문일까요?
단지 이런 시기·상황 요인 때문에 상이한 모습을 연출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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