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단은 "내린 빗물이 도로에 모여 있어 옷은 젖고 몸은 갈수록 무거워졌다"며 "두 성직자는 '괜찮다, 언제는 이러지 않았나'라고 말했지만, 장갑을 짜면 빗물이 주르륵 쏟아지고, 휴식 때마다 가슴보호대와 상의의 빗물을 짜기 바빴다"고 설명했다.
순례단은 "순례자는 근육을 풀어주는 시간에는 고통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환한 얼굴로 마음을 나눴다"며 "몸은 더 고달프지만,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평화에 마음은 밝기만 했다"고 전했다.
마웅저 씨의 눈물…"평화를 일깨우다"
"하늘에서 별을 땄어요!"
이날 순례단의 분위기는 특히 밝았다. 순례단 진행 팀에서 도로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버마(미얀마) 민주화운동가 마웅저(Maung Zaw) 씨가 8년 간의 지난한 소송 끝에 국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기 때문. 그는 오후 일정이 시작될 때쯤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버마에서 '행운이 찾아왔다'는 의미로 쓰인다.
버마 8888 항쟁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해 버마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마웅저 씨는 1994년 군부의 탄압을 피해 버마를 탈출해 한국에 왔다. 그는 지난 2000년 난민 신청을 거부한 법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고, 결국 8년만에 대법원은 그를 난민으로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이날 저녁, 순례단은 일정을 마무리하고 케이크를 마련해 마웅저 씨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케이크 위에 쓴 글씨는 'Viva Birma(버마 만세).'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축하가 이어지자 마웅저 씨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는 "버마는 지금도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태"라며 "이렇게 한국에서 종교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오체투지를 하고, 내가 이렇게 순례에 참여하는 것은 버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버마인들을 생각해서 민주화를 위해 더욱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5일 마웅저 씨는 '순례에 왜 참여했느냐'는 질문에 "이 오체투지가 언론에도 보도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지면 멀리 아시아까지 이 소식이 퍼지지 않겠느냐"며 "이 오체투지를 통해 아사아 인이 한마음이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었다.
순례단은 "이날 대법원의 결정이 마웅저 씨의 고단하기만 했던 삶에 평화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이렇게 한 사람의 눈물이 순례단 모두에게 평화의 의미를 새롭게 전해줬다"고 밝혔다.
마웅저 씨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했으며 현재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활동하고 있다. 마웅저 씨는 <프레시안>에 '버마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경제 제일주의, 현 정부가 노골적으로 강화해"
이날도 오체투지 순례 길을 멀리서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전북 임실 영천교회의 최정수 목사는 순례를 무사히 마치기를 기원하면서 "경제 제일주의는 갈수록 심해질 것"이라며 "현 정부에서 노골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참여 동기를 밝혔다.
지리산 실상사 인근에 사는 김길수 씨는 "이명박 정부가 올곧게 사는 분들을 가만두지 않는 것 같다"며 "최근 벌어지는 정치, 사회 뉴스를 보면 처참해 오체투지를 해야 하는 세상 같아 보여 안타깝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온 송희철 씨도 "두 분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며 "특히 숨이 차오르는 소리를 들을 때면 더욱 참기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두 분이 하셔야 하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 국민의 소리를 듣고 정치를 하라고 이명박 정부에 메시지를 던지시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오체투지 순례 23일째인 26일 현재 순례단은 전북 임실의 오류리 이동령 주유소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월평교회를 지나 월평로터리에서 순례를 마칠 예정이다.
* 도보순례 참가 일정과 수칙은 '오체투지 순례 카페' 공지사항을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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