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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의 고전 펜홀더, 라켓 내려놓긴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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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의 고전 펜홀더, 라켓 내려놓긴 이르다"

유승민의 탈락이 아쉬운 까닭

각본 없는 드라마는 채 본론으로 치닫기도 전에 비극으로 끝났다. 베이징 올림픽 탁구 남자단식에 출전한 유승민(26·삼성생명)은 21일 베이징대 체육관에서 열린 홍콩의 코라이착(세계랭킹 32위)과의 32강전에서 4대 2로 패해 힘없이 탈락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국제탁구연맹(ITTF)마저 곧바로 홈페이지 첫 화면에 유승민의 탈락 소식을 크게 띄워놓았다.

김택수의 뒤를 이어 한국 탁구의 대들보로 떠올랐던 유승민의 추락은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이 받아든 성적표 중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금메달 기대주의 조기 탈락 때문이 아니다. 파워 드라이브로 대표되는 한국의 팬홀더 전형이 올림픽에서 허무하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유승민의 탈락은 곧 1980년대 후반을 주름잡던 한국 특유의 스타일이 유럽과 중국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세이크핸드 전형에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으로 다가온다.

이미 한국 탁구의 주류도 세이크핸드로 넘어가고 있다. 유승민과 함께 현 한국 탁구를 대표하는 오상은(31·KT&G)도, 주세혁(28·삼성생명)도 세이크핸드 전형이다. 현재 세계 톱 랭커 중 팬홀더 전형의 선수는 유승민(세계랭킹 8위) 정도만이 남은 게 현실이다. 유승민이 아테네 올림픽 결승에서 꺾은 중국의 왕하오(25·세계랭킹 1위)는 팬홀더 전형이지만 중국 특유의 이면(二面)타법(탁구 라켓의 앞뒷면을 모두 사용) 대가이기에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로 승부를 거는 유승민의 고전적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팬홀더 전형의 약점은 명백하다. 포핸드 드라이브는 강력하지만 라켓 앞면만을 사용하는 전형 특성상 백핸드 공격과 수비는 세이크핸드 전형에 비해 취약하다. 오른손 잡이의 경우 몸 왼편으로 상대방의 공격이 들어오면 곧바로 수비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게 팬홀더 전형의 숙명이다. 라켓 양면을 다 쓰는 유럽의 세이크핸드, 중국 이면타법의 백드라이브에 한국식 팬홀더가 취약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유승민은 유남규-김택수로 대표되던 한국 팬홀더 전형의 대를 잇는 선수다. ⓒ로이터=뉴시스

더군다나 세이크핸드 전형은 라켓의 어느 쪽으로 치느냐에 따라 다른 반발력으로 공의 스피드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고 공에 엄청난 회전을 가해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코스로 공을 보낼 수 있지만, 팬홀더는 이런 다양한 공격에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유남규-김택수 시절 탁구팬이라면 아직도 '여우' 얀 오베 발트너(스웨덴)의 거짓말처럼 휘는 공을 기억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유승민의 고전적 탁구가 속구 구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놀란 라이언 스타일이라면 세이크 핸드는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구질과 절묘한 제구력으로 무장한 페르난도 발렌수엘라 스타일인 셈이다. 놀란 라이언은 미 프로야구 사상 가장 많은 삼진을 잡아낸 전형적인 강속구 투수였고,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80년대 당시 '마구'로 불리던 스크루볼을 앞세워 순식간에 야구무대를 점령한 선수다.

아테네 올림픽에서 유승민은 지독한 훈련으로 포핸드의 파괴력을 더욱 키우는 길을 택해 왕하오를 넘어섰다. 약점 보완에 집착하기보다 극단적으로 공격력을 더 가다듬는 전술이 승리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당시 유승민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매일같이 1만2000개의 탁구공을 쳤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유승민은 끊임없이 자신의 후면을 노리는 코라이착의 백 드라이브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엄밀히 말해 유승민이 무너졌다기보다 '탁구의 고전' 팬홀더가 결국 새 전형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전통의 펜홀더 전형이 올림픽에서 패했다고 아직 사라지리라 말할 수는 없다. 고전 탁구팬들은 여전히 총알처럼 날아가는 포핸드 드라이브의 매력을 잊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 2월 25일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서브를 준비하는 유승민. ⓒ로이터=뉴시스

그렇다고 팬홀더가 사라지리란 아쉬움은 아직 섣부른 감이 있다. 무엇보다 아직 유승민은 최전성기의 선수이기 때문이다.

유승민은 여전히 '살아있는 팬홀더의 전설'로 평가받는 김택수의 뒤를 이어 세계 톱랭커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대회도 곧 다가온다. 유승민, 곧 한국식 팬홀더가 이면타법, 세이크핸드와 맞설 날은 많이 남아있다.

유승민의 뒤를 이을 팬홀더 전형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아직 팬홀더가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고 쉽게 단정해서도 안 된다.

올해 61세의 놀란 라이언은 얼마 전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여전히 90마일짜리 직구를 던질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유승민도 실력으로 "여전히 팬홀더는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길 기원한다. 이대로 사라지기에는 뻔히 대비하고 있는 상대방의 정면으로 드라이브를 걸어 총알같은 탁구공을 날려보내던 한국 선수들의 포핸드 드라이브가 너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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