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에너지는 이 사실을 회사차원에서 알고 있었지만 탱크의 불법 이용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법 행위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직원을 괴롭혀 회사를 스스로 나가게 유도했다.
SK에너지, 15년 간 중유탱크→등유·경유탱크로 이용
17일 전 SK에너지 관계자에 따르면, SK에너지는 1993년 5월 4일 포항 저유소에 여덟 번째 유류저장탱크 T-9을 '중유용'으로 허가받아 증축했다. 저유소는 정유 회사가 생산된 석유를 보관하는 일종의 물류창고다.
SK에너지는 이 저장탱크에 지난 15년간 등유와 경유를 저장해왔다. 이는 위험물안전관리법 위반이다. 위험물안전관리법에는 저장 위험물의 최대수량에 따라 각 탱크 간 이격 거리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시행규칙 별표6 '옥외탱크저장소의 위치·구조 및 설비의 기준'). 저장 위험물이 지정수량의 500배 초과~1000배 이하일 경우에는 탱크간 거리를 5m 이상으로, 지정수량의 1000배 초과~2000배 이하일 경우는 9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제2석유류(등유, 경유)의 지정수량은 1000리터, 제3석유류(중유류)는 2000리터인데, T-9의 용량은 109만 리터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등유와 경유가 보관되는 이 탱크는 지정수량의 1000배가 넘기 때문에 인접 탱크와 9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제보자에 따르면 T-9탱크와 인접한 T-6탱크의 이격 거리는 5m 정도에 불과하다.즉, SK에너지는 사실상 등유·경유 저장탱크인 T-9의 이격 거리와 관련해 지난 15년 간 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또 중유 저장탱크를 경유 저장탱크로 용도 변경할 경우에는 위험물안전관리법 제6조 1항에 따라 시장 또는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다.
등유, 경유가 제2 석유류로 묶이고 중유류가 제3 석유류로 분류돼 이격 거리에 차이가 나는 까닭은 인화점 때문이다. 분류 기준에 따르면 제2석유류는 1기압에서 인화점이 섭씨 21도 이상 70도 미만인 인화성액체다. 반면 제3석유류의 인화점은 같은 기압에서 섭씨 70도 이상 섭씨 200도 미만이다. 등유와 경유가 중유에 비해 불이 쉽게 붙기 때문에 안전상 보관 탱크간 거리를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
특소세 인상 등 유가 인상 효과 극대화하기 위해 불법 운용
SK에너지가 저장탱크를 불법적으로 운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등유탱크로 허가를 받을 수 없으니 중유탱크로 허가를 받고 시장 수요에 맞춘 것이다. 중유는 주로 선박이나 보일러 등에 사용된다. 등유는 지금은 수요가 적지만, 과거 기름보일러 원료로 많이 쓰였다. 경유는 자동차 등 엔진 연료로 널리 이용된다.
SK에너지는 특히 유류 가격 인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등유 대신 경유를 집중적으로 T-9에 보관하기도 했다. 주로 매년 6~7월 경 특소세가 인상되는 점을 감안해 시기를 맞춰 특소세 인상액이 실내등유보다 훨씬 높은 경유를 탱크에 집중적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특소세 인상은 곧바로 유류가격 인상으로 이어진다. 보관하고 있던 경유를 세금 인상 후 출하하면 회사는 세금 인상분만큼 이득을 볼 수 있다.
SK에너지가 지난 2003년부터 작년까지 이렇게 불법적으로 출하한 경유량만 367만3686리터에 달한다. 지난 15년 간 등유와 경유를 합한 총출하량은 약 5억3000만 리터다. 등유와 경유를 각각 리터당 920원, 1450원으로 잡고 출하분을 금액으로 환산할 경우 약 5460억 원의 매출이 발생했다는 결과가 나온다.
경영진도 인지했지만…내부 직원 문제제기 묵살
이 문제는 지난 2005년 내부감사를 통해 자체시정 명령이 내려오면서 사내에서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잘못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제보자는 "회사 내부적으로 1993년 이후 수차례 법적인 문제가 이슈화됐지만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다"며 "무단운용 사실 자체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문제제기는 줄기차게 이어졌다. 결국 문제의 T-9 탱크는 올해 2월 19일이 돼서야 운용이 중단됐다. 회사가 잘못을 인정한 셈이다.
SK에너지 고위급 간부는 이번 일에 대해 "과거에 유종 간 수급 불균형이 생길 때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 시정된 사안이다. 과거의 세세한 사항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회사차원에서도 과거의 법규 위반 사실은 인정했다. 홍보팀 관계자는 "중유로 허가받은 탱크의 일부를 등유 저장용으로 활용한 사실이 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며 "지난 2005년 감사에서 문제제기가 돼 합당한 시정조치를 했다. 지금은 탱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결국 한 직원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회사의 잘못된 관행이 바뀌었다. 하지만 회사의 불법 행위를 바로잡은 직원에게 돌아온 것은 보상이 아닌 퇴사 압력이었다.
제보자는 "일부 상사가 '당장 나가지 않으면 명예퇴직금도 못 받을 것이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 될까 두렵기도 했고 회사에 대한 애정도 식어 퇴사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회사를 제 발로 나왔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SK에너지는 포항저유소에서 15년 가까이 이어진 탱크 불법 운용을 중단했다. "지금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회사측 입장은 '과거 잘못'을 떼놓고 봤을 때는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국내 최고의 에너지 회사가 저유소의 안전, 나아가 저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인근 주민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돈벌이에만 급급했다는 점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SK에너지는 전날 주요 일간지에 '우리나라의 석유제품이 수출품목 1위에 올랐다. 우리도 에너지 수출국이 됐다'는 내용의 '국민기업형' 광고를 내보냈다. SK에너지가 진정한 국민의 기업이 되기를 원한다면 모든 국민에 적용되는 법의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지키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는 분식회계 파문에도 SK그룹을 조용히 지켜본 국민에 대한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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