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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88만원 세대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뷰포인트] 미국 틴에이지 영화 <찰리 바틀렛> 리뷰

미국 틴에이지물에는 종종 너무나 영민하고 똑똑한 머리로 '어른들을 찜쪄먹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1999년작 <일렉션>에서 리즈 위더스푼은 만만한 남자선생님을 유혹하고 미성년자 강간죄로 학교에서 쫓겨나게 만드는가 하면, 그녀를 거슬려하던 매튜 브로데릭을 기어코 선거 조작까지 하게 만들 만큼 얄미운 행동을 일삼는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1998년작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 나오는 제이슨 베이츠먼은 비록 학교 성적은 바닥이지만 각종 교내 클럽활동을 회장 자리를 도맡아 활동하며 심지어 학교선생님을 두고 빌 머레이와 삼각관계의 사랑싸움까지 벌인다. 경우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마크 S. 워터스 감독의 2004년작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는 어른들도 식겁할 정도로 정치적인 음모와 모략을 펼치는 여고생들이 등장한다. 이런 틴에이지물들의 특징은, 영화가 타겟으로 삼는 관객이 틴에이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류의 영화들은 오히려 거대한 은유에 가깝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실은 어른들의 사회를 풍자하고 있거나, 아이들의 성장을 다루면서 실제로는 어른들의 상처를 돌아보는 것이다.
찰리 바틀렛
<찰리 바틀렛>에서 안톤 옐친이 분한 찰리 바틀렛도 이렇게 '어른 흉내를 내며' 사고를 일으키는 미국 고등학생의 계보에 서있다. 그는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화장실에 상담소를 차려놓고 아이들에게 정신상담을 해주며 자신이 정신과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을 팔아 교장선생인 가드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요주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그가 가드너의 신경을 더욱 긁어놓은 건, 나이가 들수록 자신과 멀어지는 딸, 수잔과 공공연히 사귄다는 것. 그런데 조숙한 십대가 나오는 무수한 영화들 중 <찰리 바틀렛>이 명백히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를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것은, 찰리와 가드너 교장과의 그토록 격한 대립이 결국은 상호 간의 이해와 우정으로 바뀌며 일종의 유사-부자관계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찰리의 상처를 다루며 그의 성장의 과정을 중심적으로 다루지만, 그의 이야기 사이로 가드너의 상처와 고독을 그린다. 아내와의 이혼 후 바닥을 한 번 쳤던 그의 인생은 교장이라는 사회적 위치와 사랑스러운 딸의 존재를 통해 겨우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남에게 권위를 휘두르는 일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그 자신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언제나 술병을 끼고 사는 그의 삶은 바닥에서 이제 조금 올라온 상태일 뿐, 바닥을 칠 때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다. 10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방비 상태로 전쟁터에 투입되는 것과 같다는 점은 미국에서도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우리의 아이들만큼 성적 때문에 숨막혀하지는 않겠지만, 아이들의 사회는 나름대로의 룰과 문화가 있고 그 안에는 언제나 왕따와 부적응자가 있다. 자신의 존재를 각성하지만 이 존재에 아무런 자존감을 느끼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도,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힘겹게 배워야 하는 것도 10대 때다. 거기에 다른 사람들과 사회 안에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 그리고 이성과 교감하는 방법까지도. 사실 10대는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은 나이다. 그렇기에 그 나이 때 가장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건 본받거나 멘토로 삼을 수 있는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아이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어른의 삶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군장을 갖추고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 역시 공포에 빠지고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찰리 바틀렛>과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가 공히 다루는 공통된 주제도 바로 이것이다.
찰리 바틀렛
어쩌면 아이가 진정으로 어른이 되는 것이란, 어른의 삶 역시 고독과 공포와 '무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난감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라는 것, 그러나 그 고독의 무게와 책임은 오롯이 혼자 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가 애이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것이 어렵다'는 식의 불완전한 자기 위로는 필연적으로 '어른이 되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동반한다. 이것은 힘들어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흔히 던지는 충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알고 있다, 그 어른들의 삶 역시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일도 큰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이라고 충고하거나 위로하는 어른들이 실제로는 밤에 혼자서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쉬어댄다는 것을. 저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느끼거나, 보다 완전하고 기꺼이 닮고 싶은 어른을 기대하고 만나고 싶은 건 아이들의 당연한 기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깨닫게 된다. 인생의 모든 국면에 있어 쉬운 것이 하나도 없음을. 어른들도 10대인 자신들처럼 철없는 사고를 치기도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런 어른이라 해도 아직 아이인 자신을 도울 수 있고, 자신 역시 그런 어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아이는 한뼘 쑥 성장한다. 10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이 행여 남에게 들킬세라 마음 속에 꼭꼭 숨겨놓고 있는,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아이들 역시 그렇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어른의 흉내를 내며 어른들에게 도전하는 때는, 어쩌면 그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기보다 그가 과연 자신의 롤모델 혹은 멘토가 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에게 멘토가 되어달라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처절하게 부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미국 틴에이지 영화들 속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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