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그룹 비자금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집안은 이명박 대통령 집안과 사돈 사이다. 그리고 조 회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며 전경련과 밀접한 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검찰의 수사 속도에 관심이 쏠리는 게 당연하다.
이명박 사돈 기업 비자금 사건, 수사는 지지부진
국가청렴위원회(현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효성 내부자로부터 "효성이 수입 원가를 부풀리는 방식으로 200억~3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제보를 받아 조사했다. 조사를 마친 뒤, 청렴위는 제보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조사 결과를 검찰에 넘겼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검찰의 수사가 갑자기 정체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효성그룹은 2000년께 효성 일본 법인으로부터 부품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납품단가를 부풀리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
비자금 의혹에는 늘 탈세가 따라다닌다. <시사IN> 최근호에 따르면, 조석래 회장의 막내동서 주관엽 씨가 실소유주인 군납업체 로우전자는 위장회사 및 가공회사 4개를 동원해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급해 수입 원가를 부풀리는 방식으로 약 80억 원대 세금을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는 매우 복잡한 과정으로 진행됐다. 효성그룹의 미국 현지 법인인 효성아메리카도 이 과정에 가담했다.
검찰 수사가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까닭에, 효성그룹의 탈세 및 비자금 혐의가 언제쯤 확인될지는 알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혐의에 매우 높은 신빙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효성 비자금 사건 조사 결과에 대해 청렴위 전문위원 9명이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이들 전문위원은 모두 판사·검사·변호사 출신이다.
효성 비자금 사건, 대외 무역을 통한 비자금 조성 사례
효성 비자금 사건은 대통령 친척이 연루돼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런 점 외에도 살필 만한 대목이 많다. 재벌의 해외 현지 법인이 비자금 조성 및 탈세에 적극 가담했다는 점도 그 중 하나다.
1990년대 이후, 해외 현지 법인을 운영하는 국내 기업이 크게 늘었다. 해외 법인을 통한 비자금 조성 및 탈세 가능성에 대한 의혹은 제기돼 왔지만, 구체적인 사례로 드러난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효성 사건이 불거졌다. 이 사건은 수입 가격을 부풀리고,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행하는 등 수법이 보편성을 띠고 있다. 특정 분야 기업에서만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해외 법인을 운영하는 기업이라면 어디서나 동원할 수 있는 수법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재벌이 해외 법인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세금을 회피한 사례로 폭넓게 인용할 만하다.
비자금 조성 수법으로 흔히 꼽히는 게 건설업체가 인건비를 부풀리는 것이다. 하지만 수출입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하면, 이런 전통적인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자금을 빼돌릴 수 있다. 내수가 아닌 무역이 경제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의 특성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효성 비자금 사건은 더 많은 관심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전가격 조작', 천문학적 규모의 탈세와 비자금 조성이 가능해진다"
효성 측이 효성 일본 법인에서 수입한 가격을 가리키는 단어가 '이전가격'(Transfer Price)이다. 학자들은 '이전가격'을 "서로 다른 국가에 있는 관련기업 간에 이루어진 거래가격"이라고 정의한다.
효성 비자금 사건은 '이전가격' 자체를 허위로 신고한 경우다. 효성 측이 효성 일본 법인에 지불한 수입가격을 실제 수입가격보다 높게 회계처리한 뒤, 차액을 비자금으로 빼돌린 것.
여기서 의문이 든다. 만약 효성 측이 실제로 수입가격을 높게 지불했다면? 얼핏 생각하면, 현실에서 이런 경우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실제로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역시 명백히 법에 어긋난다. 조세 전문가들이 '이전가격 조작'이라고 부르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효성 측은 실제로 높은 가격을 지불했건, 회계 상으로만 높은 가격을 지불했건 비리를 저지른 셈이 된다.
지난 2003년 12월 한국조세연구원이 발행한 "국제조세 회피의 행태 및 경제적 효과 분석"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모회사와 해외 자회사 간 거래는 전세계 무역거래의 3분의 2를 넘는다. 그리고 이런 기업은 세율이 낮은 국가에 있는 자회사에 이익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세금 지출을 줄일 수 있다. 세율이 높은 국가에서 거둔 소득을 세율이 낮은 국가에서 발생한 것으로 바꾸는 수단이 '이전가격 조작'이다.
또 회계 투명성이 낮은 국가에 이익을 넘겨서 비자금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도 '이전가격 조작'이 필요하다.
미국 등 선진국들은 오래 전부터 '이전가격 조작'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세계 곳곳에서 현지 법인을 운용하는 다국적기업이 무역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세금을 회피할 경우, 국민 경제에 미치는 피해는 천문학적인 반면 적발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개방 이후, 중국 정부가 자국에 투자한 외국 기업들이 '이전가격 조작'을 통해 세금을 회피하고 부를 빼돌리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관련 기사: "우리도 '곰'이 될 수 있는데…")
효성 비자금 사건, '이전가격' 감시 강화 계기 돼야
'이전가격 조작'을 다룰 때, 중요한 대목은 "'정상가격'을 어떻게 정할 것이냐"라는 문제다. 정상에서 벗어나 부풀려졌거나, 깎인 가격인지를 판정하려면, '정상가격'을 먼저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가격'을 정하기 위해 흔히 쓰이는 방법은 '비교가능 제3자 가격법'(CUPM), '재판매가격법'(RPM), '원가가산법'(CPM) 등이다.
효성 측이 효성 일본 법인에서 수입한 가격(이전가격)은 이 가운데 어떤 방법을 적용해도 정상가격보다 크게 부풀려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재벌이 이런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고, 세금을 회피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부족한 세수를 나머지 국민이 메워야 하기 때문.
따라서 효성 비자금 사건은 정부가 '이전가격'에 대한 감시를 보다 엄격하게 해야 할 필요성을 알리는 신호로 볼 수 있다.
"국민 건강보다 무역이 중요하다"는 대통령, 사돈 기업 비리에서 뭘 배웠나?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9일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요구를 거스르고 쇠고기 재협상을 하지 않은 것을 변명하며 "기름 한 방울 나지 않고, 변변한 자원조차 없는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길은 통상(通商)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도, 이 대통령은 철강과 자동차를 더 많이 팔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었다. 수출입 무역 활동이 국민의 건강권을 일부 포기할 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이 대통령은 사돈 기업의 비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효성 비자금 사건이 던진 교훈은 명쾌하다. "무역 활동이 아무리 활발해도, '이전가격'을 제대로 감시하지 않으면, 기업의 부(富)는 비자금으로 새나간다"라는 것. 물론, 이 대통령이 이런 교훈을 얼마나 진지하게 새기고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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