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경찰은 "컨테이너에 시민들이 오르는 걸 방지하려고 그리스를 발랐다"고 해명했다. 또 경찰은 "그리스는 강제로 장시간 불을 붙이지 않는 한 쉽게 점화되지 않는 윤활제"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런 해명을 보고도 기자는 경찰이 컨테이너에 그리스를 바르는 걸 보면서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컨테이너의 그리스는 자칫하면 대형 사고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화재, 폭발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우선 그리스는 발화점이 낮다. 시중에 유통되는 공업용 그리스가 대개 50~100℃ 안에서 사용하도록 돼 있는 것도 발화점이 낮기 때문이다. 수십 만 명이 촛불을 들고 모이는 집회를 통제하고자 설치한 컨테이너에 낮은 온도에서도 쉽게 불이 붙는 그리스를 굳이 칠한 경찰의 배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경찰이 1000℃에도 불이 붙지 않는 특수 그리스를 썼을 리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리스와 같은 제품을 관리하는 이들에게는 불문율이 있다. 절대로 그리스는 톱밥과 같은 불이 잘 붙는 다른 물질과 함께 보관하거나, 그런 물질과 섞이도록 관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경찰은 그리스를 칠하고 나서 거기다 불이 잘 붙는 태극기를 걸어뒀다. 나중에 태극기를 떼기는 했지만 이런 불문율을 염두에 두면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만에 하나 그리스에 불이 붙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스를 취급하는 이들이 꼭 챙기는 게 있다. 바로 이산화탄소가 든 소화기이다. 그리스와 같은 유류 화재는 이산화탄소를 분사해 산소를 차단해야만 불길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그리스에 붙은 불을 끄고자 물을 끼얹는다면 또 다른 폭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잘 알다시피 기름은 물과 섞이지 않는다. 그리스와 같은 기름은 물보다 비중이 적기 때문에 물을 끼얹으면 불길이 잡히기는커녕 오히려 물 위에 뜬 기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불길이 더 확산할 수 있다. 만약 불길을 본 시민, 경찰이 당황해서 물이라도 끼얹는다면 그 이후 사태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1991년 6월의 기억? 그럴 리 없다!
경찰이 이렇게 위험한 그리스를 굳이 컨테이너에 바른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컨테이너에 오르는 걸 방지하려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정말 '아찔한' 모험을 한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민들은 컨테이너에 오르고자 (불이 잘 붙는) 스티로폼 상자를 컨테이너 곁에 쌓고 있다. 물론 경찰은 이 상황을 놓고 그 흔한 경고 방송 한 번 하지 않았다.
정말 의문이다. 늘 시민의 안전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는 경찰이 이런 그리스의 위험을 몰랐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럼 혹시 인터넷 게시판에 일부 누리꾼이 제기하는 의혹처럼 사고를 일부러 유도하고자 그리스를 칠한 것일까? 경찰은 "이런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인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그렇다. 경찰이 그럴 리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괴담'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개를 흔드는 순간 1991년 6월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한국외국어대에 당시 정원식 신임 총리를 보내 제자(?)들로부터 달걀 세례를 받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극적으로 사태의 반전을 꾀할 수 있었다. 만약 오늘 광화문에서 시민의 방화, 폭발 사고가 있다면? 이것은 이명박 정권으로서는 1991년 6월의 달걀 세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태의 반전을 꾀할 수 있는 호재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10일 이상한 일이 또 있었다. 한 달 내내 정부 입장만 되뇌던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용감하게 수십만 명이 모인 촛불 집회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국민과 소통하고자 나왔다는데, 그가 수십만 명의 시민 앞에서 정부 입장만 되뇌다 만에 하나 불상사라도 당했다면?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리 벼랑 끝까지 몰렸다고 하더라도, 설마 국민을 상대로 그런 끔찍한 계획을 짰을 리가 없다. 그래, 그럴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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