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저녁 7시 30분, 열여덟 번째 촛불 집회가 서울 청계과장에서 '어김없이' 열렸다. 촛불 집회 집중 요일(수요일, 토요일)이 아니었음에도 약 2만 명이 넘는 시민이 청계광장을 메웠다. 이날도 역시 자유 발언대에 오르려는 사람이 많아 일부 시민은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지난 주말 있었던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이날 집회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좋았다. 발언대에 오르는 시민은 그 동안 연습해 온 춤을 선보이고 개사한 대중가요를 열창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청계천에 모인 6000여 명의 경찰은 이날 특별히 할 일이 없어 보였다. 시민은 분노를 축제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드디어 대학생이 움직입니다"
지난 주말 동안 시민 68명이 연행됐다. 집회의 구호는 "미친 소 너나 먹어"에서 "이명박 탄핵"으로 바뀌었다. 정치색이 짙어진다는 우려가 나올 법했다. 정권 퇴진을 바라는 시민과 쇠고기 재협상만을 요구하는 시민 사이 의견이 갈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기우였다. 시민들은 스스로를 "우리는 강경파도, 평화파도 아닌 촛불파"라고 정의했다. 경찰의 강경 진압을 놓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지난 민주화 운동도 모두 불법"이라고 비판하던 송승호(22·대학생 나눔문화 소속) 씨는 "시민은 절대 분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경파·보수파 못지않게 시민들을 갈라놓았던 우려는 '20대 참여 저조'였다. 이 역시 상황이 바뀌었다. 이날 발언대에 가장 많이 오른 세대는 바로 20대 대학생이었다. 그들 스스로 "우리가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 신촌에서 휘두른 날 선 방패는 오히려 시민들을 더욱 뭉치게 했다.
이승은(20·대학교 2학년) 씨는 무대에서 시종일관 흐느꼈다. 이 씨는 "지난 주말 학교 친구 두 명이 연행됐다"며 "전경은 제발 당신들의 동생·누나·친구인 시민들을 때리지 말아 달라"고 외쳤다.
자신을 서울에 사는 27살 대학생이라고 소개한 시민은 발언대에서 "고위관료는 호의호식하고 있는데 경찰은 왜 문제를 제기하는 민중이 잘못됐다고 얘기하나"며 "그들이 우리를 탄압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들 잘못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해 큰 호응을 받았다.
이날도 쇠고기 재협상보다 대통령과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김지은(23·대학교 4학년) 씨는 "땅투기하는 국회의원은 안 잡고 국민을 연행하는 법은 쓰레기일 뿐"이라며 "대학생으로서 친구들과 함께 끝까지 정부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또 다시 장관고시를 연기한 정부를 놓고 "지금까지 뭐 하느라 국민의 의견을 모으지 못했나"고 비꼬며 "2MB는 용량이 딸리니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제까지 청소년에 비해 대학생의 움직임이 적었지만 분노가 커지고 있다"며 "대학생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외쳤다.
농민 아들에서 기자까지…"대통령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날 발언대에는 어느 때보다 다양한 사람이 올랐다. 농민의 아들이 대통령에게 일침을 가했고 노동자는 "시민의 앞에 서겠다"고 다짐했다. 기자가 펜대를 놓고 마이크를 잡았고 국회의원은 무대에서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장애로 일부 행동에 제약이 있는 위현복(23·대학교 2학년) 씨는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내가 존경하던 사람이 아니다"며 "나 같은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국민을 진심으로 섬기라"고 주문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한우 100두를 키우시는 농민이라며 "아버지의 꿈을 대통령이 꺾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 8시 25분 경 무대에 오르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수많은 시민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강 의원은 "정부가 장관고시를 연기했다. 바로 여기 모인 여러분이 해냈다"며 "더 큰 함성으로 국민의 요구를 청와대로 보내자"고 권유했다. 강 의원은 "정치권이 잘못해 많은 젊은이가 유치장에 가게 돼 속죄하는 마음으로 삼보일배를 했다"며 "더 이상은 다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날도 역시 조·중·동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승은 씨는 "정부의 밑닦이 노릇만 하는 대형 언론사가 언론인이 되고 싶었던 제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며 "제발 펜대를 부수고 초를 들어 달라"고 외쳤다.
현직 기자도 언론 비판을 위해 펜 대신 마이크를 들었다. '맞불'의 정지윤 기자(36)는 "조·중·동은 쓰레기 언론이고 찌라시"라며 "조·중·동이 말하는 '불법 폭력' 혐의로 구속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정운천 장관과 민동석 차관보,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은 폭력을 이용함으로써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며 "국민의 가두행진을 무시한다면 민중항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도 자리를 지켰다. 그는 "드디어 어른들이 나섰다"며 "민주노총이 있는 힘을 다해 국민의 앞에서 투쟁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 동안 '폭력 시위'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민주노총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자 많은 시민이 호응했다. 이전과는 달라진 분위기였다. 촛불을 든 많은 사람이 이번 주말 있었던 강경 진압 과정을 지켜보며 "생각을 바꿨다"고 대답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박모(21·대학교 2학년) 씨는 "그 동안 시위를 볼 때는 막연히 '폭력 시위는 나쁘다'고 생각했다"면서도 "이번에 죄 없는 시민들이 경찰에 맞는 것을 보며 노동자와 농민들이 왜 경찰과 싸우는 지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석행 위원장의 발언이 끝나자 큰 환호를 보내며 박수를 쳤다.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던 소망교회에서 온 교인도 촛불을 들었다. 유모(40대 중반·서울 종로구) 씨는 "이명박 대통령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국민을 섬길 줄 알았다"며 "선출됐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지금은 같은 교인이라는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축제로 승화시킨 분노
이날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사람은 33살 벤처 기업인이었다. 콘텐츠 개발업체 '위러닝'의 대표 홍창기(33·서울 관악구) 씨는 '노브레인'의 '넌 내게 반했어'를 개사한 노래를 부르며 시민들을 휘어잡았다.
많은 시민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미친 소 너 먹어"를 불렀다. 그는 "학생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사업 약속도 취소하고 거리로 나왔다"며 "노래를 부르기 위해 퇴근길에 가사를 바꿔 연습했다"고 말했다.
발언대에 오르는 많은 사람이 공연 무대를 만들었다. 중앙대에서 온 6명의 대학생은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를 불렀다. 그들은 "국민의 목소리 들려오는 광화문의 촛불 찾아서 이곳에서 행진을 시작해"라고 외쳤다.
10대들은 이날도 톡톡 튀었다. 청소년 모임 '10대 연합'에서 나온 학생 5명은 미리 준비한 율동을 선보이며 큰 박수를 받았다. 신모(고등학교 3학년·서울 구로구) 양은 "우리 단체를 이끄는 선생님도 경찰에 맞는 시민을 도와주러 갔다가 연행됐다"며 "국민을 지켜주라는 경찰이 왜 대통령을 지켜주고 있나"고 물었다.
시민들은 여전히 정부에 분노했다. 하지만 그들은 슬기롭게 분노를 축제의 열기로 바꿀 줄 알았다. 일부 시민이 문화제가 끝난 후 명동쪽으로 평화행진을 이어갔지만 큰 불상사는 없었다.
오히려 시민은 그 자리에 모인 경찰을 부끄럽게 했다. 누리꾼 일부는 미리 준비해 간 생수를 경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문화제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전윤석(32·'엠엘비파크'에서 모금 운동 참여) 씨는 "이번 집회가 특정 집단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계기가 된 것 같다"며 "앞으로 더 다양한 세대와 직업, 지역의 사람들을 포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시민 종로에서 경찰과 대치 중…"무사 귀환했으면" 이날도 일부 시민은 거리 행진을 시도하다 경찰과 대치했다. 촛불 집회가 시작할 때부터 시민 수백 명은 청계광장 맞은 편 동화면세점 앞에서 경찰에 둘러싸인 채, "이명박 탄핵"을 외치며 별도로 집회를 가졌다. 이들은 "이명박 탄핵"과 함께 "경찰청장 사과", "연행자 석방"도 요구했다. 9시 50분께 촛불 집회가 끝나자 일부 시민이 이들과 합류해 거리 행진을 시도했다. 27일 오전 12시 30분 현재 시민 수백 명은 종각에서 경찰과 대치 중이다. 인터넷 방송을 통해 이를 지켜보는 시민은 이들이 큰 충돌 없이 무사 귀환하기를 바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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