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들면서 신림동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서울시를 제외한 지방 정부에서는 아예 신규 채용이 없어진 것 같다는 말이 나돌거든요. 작년에 국토해양부 7급에 붙은 친구는 아직 발령을 못 받았다고 해요. 그러면 올해나 내년에 붙을 공무원 역시 갈 곳이 없어진다는 말과 다를 거 없잖아요. 있는 공무원은 줄이고 새로 뽑는 인원수는 줄이는 추세니까 '올해 안 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죠."
얼마 전까지만 공무원이나 공기업체 입사시험은 대부분 대학생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른 어떤 직장보다 높은 안정성이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공무원 인원감축과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이들은 심리적으로 급격히 위축돼가고 있다. 당장 지난 14일 충청남도는 "정부 방침에 따라 공무원 103명을 감축했다"고 밝혔다.
채용 규모가 줄어드는 데 따른 위기감은 공기업 준비생 역시 비슷하게 느끼고 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 이지연(24, 가명) 씨는 주변의 공사 준비생을 볼 때마다 불안감만 커진다고 말한다.
"대기업 L모사에서 인턴했고 채용사이트에서 팀장도 했어요. 국제영화제 홍보요원 경험도 있구요. 그런데 학벌이나 외국경험 등은 도저히 제 노력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안 그래도 취업문은 좁아지는데 주변에 정말 뛰어난 친구들도 줄줄이 낙방하는 것을 보면 많이 위축되는 게 사실이에요."
고시공부 시작하면 '막장' 된다
김 씨에게 "어려우면 다른 일반 기업에 도전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다른 데는 가고 싶어도 못 간다고 답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서 학점이고 토익이고 다 제쳐놓는 애들이 대부분이에요. 더군다나 저희는 고시원에 틀어박혀서 공부만 하잖아요? 기업에서 원하는 다양한 경험이나 외국어 능력은 완전히 바닥이에요. 지금은 옮기고 싶어도 뽑아줄 기업이 없어요. 이것(공무원) 아니면 할 게 없어요."
김 씨는 신림동을 두고 "좋게 말하면 큰 꿈을 안고 온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다르게 보면 인생의 '막장'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험은 다른 취업 준비생들 역시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다.
3년 째 방송사 PD직에 도전하다 올해 꿈을 접은 최병원(31, 가명) 씨는 요즘 들어 극심한 무력감에 빠져 있다. 도무지 입사할 수 있을 만한 기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3년째 꿈꿔온 방송사 PD직 도전을 접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기업체 입사가 현실과의 타협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많이 달랐다.
"지금 와서 기업체들 공고를 보면 한 숨이 나와요. 기업에서 요구하는 어학능력이나 기업 경영에 대한 이해, 다양한 경험 등은 저와 거리가 멀더라구요. 더군다나 경쟁이 치열하기는 여기도 마찬가지잖아요. '아, 이젠 내가 갈 곳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요."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문…100여 명을 제쳐야 내가 산다
취업문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대기업, 공무원 등 소위 '괜찮은' 일자리에서 뽑는 인원은 한정돼 있다. 거기다 채용 규모도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신입사원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다. 예전처럼 공무원 등 다른 시험을 준비하다 돌아온 학생이 상대적으로 높은 학벌 등을 무기로 턱하니 붙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19일 취업포털 '사람인'에 따르면 대기업과 공기업을 포함한 주요 기업의 올해 상반기 입사경쟁률은 평균 120대 1에 달했다. 작년 하반기에는 97대 1이었다.
교보문고의 취업 경쟁률은 1136대 1로 가장 높았다. 공기업 중에서는 한국조폐공사(407대 1)가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회사였다. 금융권 입사를 꿈꾸는 사람은 한국수출입은행의 경우 150명을 제쳐야 했다.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및 졸업자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올해 초 대학을 졸업한 김은정(25, 가명) 씨는 취업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있다.
"미국에서 어학연수도 했고 학점도 그리 떨어지지는 않는다 생각했는데 요즘 준비생들 보면 스펙(취업준비자들이 학벌, 성적, 경험 등 취업에 도움이 되는 모든 능력을 일컫는 말)이 장난 아니더라구요. 전공이 독일어과라 당장 원서를 넣을 데도 몇 없고 기업체 인턴 경험도 없어서 막막할 때가 있죠."
그룹사 중에서는 CJ그룹이 120대 1을 기록해 가장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따르면 상반기 15대 그룹 중 공채를 끝낸 자산 상위 11개 그룹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 그룹의 대졸 신입사원 채용 경쟁률은 평균 33.5대 1이었다. 작년에는 31.7대 1로 올해보다 낮았다. 양질의 일자리가 그만큼 더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특히 이들 '괜찮은' 직장에서 뽑는 인원이 갈수록 줄고 있다는 점이 대졸자 취업난의 주원인이다. 생산성이 극도로 높아지는 추세인데다 산업 구조도 점차 정보화하면서 요구 인원 자체가 과거보다 적기 때문이다. 한창 성장세에 있는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에서 채용 인원수를 늘려가는 곳은 찾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 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진 학생들은 자연히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 노출된다. 운 좋게 중소기업에 간다 하더라도 기업이 처한 환경 자체가 대기업에 비해 훨씬 불안정하기 때문에 젊은층의 불안감도 지속된다.
우리나라에서 5년 이상 생존하는 중소기업은 열에 둘 정도밖에 안 된다. 사실상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상황에서 생존의 위협은 더 커진다. 20대의 40%가 일용·임시직으로 전락하는 게 현실이다. 대학생들도 이를 느끼고 있다.
김은정 씨는 "사실 대졸자들이 지나치게 눈이 높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그나마 안정적인 직장은 대기업과 일부 중소기업을 제외하고는 찾기 어려운 게 현실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 씨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어느새 삶의 목표가 된 듯해서 씁쓸하다"고 말했다.
'88만원 세대'들이 왜 촛불집회에 안 나오나구요?
갈수록 어려워지는 취업환경에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지 못한다는 자괴감과 함께 주변의 시선은 이들을 가장 힘들게 하고 있다.
김민철 씨는 "고시 공부를 하려면 한 달에 90만 원 이상은 기본으로 든다"며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처지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기도 싫어진다"고 말했다.
김은정 씨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취업하지 못한다는 현실에 상대적으로 '쉽게' 사회에 안주한 친구들을 보며 이들은 쉽게 패배의식에 빠지기 마련이다.
지난 17일 촛불 문화제 현장에서 만난 박민희(24, 대학생) 씨는 "학교에서 사회 문제에는 전혀 관심 없이 공부만 하는 친구들을 보면 답답하다"면서도 "대학생들이 절박한 처지에 내몰리면서 패배의식에 젖은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꽉 짜인 사회로 진출하는 문 앞에서 대학생들이 집단적인 무기력함을 경험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자리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
지금과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궁극적으로는 민간부문에서 일자리가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기업을 강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일자리를 나눠 고용을 늘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격차를 줄이는 등 대안을 찾아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좁은 취업문을 통과한 '소수'만을 위한 사회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과)는 "신산업 육성과 사회적 일자리 늘리기 등 다양한 대안이 언급되지만 근본적으로는 민간부문에서 일자리가 늘어나야만 한다"며 "당장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모색이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대안의 하나로 "일자리를 나눠 고용을 늘리는 게 한 방법"이라며 "노동계나 경영진이 노동시간 단축과 그에 따른 임금 조정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의 경우 대부분이 대기업에 비해 지나치게 열악한 고용 환경을 제공하는 게 현실"이라며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격차 등을 줄여 상대적으로 괜찮은 직장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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