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캠페인의 두 번째 기고자인 언니네트워크의 최이슬기 씨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에 대해 무딘 감수성을 갖고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일상의 폭력에 너그러운 사회. 그래서 여성들은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내면화한 채 살아가고 남성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 필자는 우리들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자신과 타인의 역할을 성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폭력으로부터 해방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편집자>
얼마 전 가평으로 언니네트워크 운영진 엠티를 다녀왔다. 어쩌다보니 회의가 밤까지 이어졌고 숙소 밖에서는 한 무리의 남성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놀고 있었다. 소음은 둘째치더라도 내용이 음담패설이라 불쾌했고 견디다 못해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우리의 존재를 인식했다. 놀러 와서 저렇게 방에만 있다니 '교회에서 온 여자들 아니냐'며 수군대던 그들은 회의가 끝나고 방 밖으로 뛰쳐나가 밀린 담배를 한 대씩 입에 무는 여자들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줌마'들 집에서 애나 보지 뭐하러 나왔냐는 고전적인 발언으로부터, '아가씨'들에게 남은 술을 권하는 발랄함까지 버무려 시비를 걸고 떼를 쓰면서 온 몸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어필하는 그들을 '구경'하면서 우리는 즐겁게 놀았다.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고, 낄낄대면서. 원치 않았지만 숙소 앞마당과 하늘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던 그날 밤의 배경음악은 '년'으로 끝나는 온갖 쌍욕들이었다.
만일 우리가 수적으로 열세였거나, 그곳이 좀 더 밀폐된 공간이었다면 충분히 공포스러울 만한 상황이었다. 혹은 그들이 동료이거나 직장 상사였다면? 그들의 반응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긴 했지만, 그다지 낯설지는 않은 풍경이었다. 몇 년간 이화여대의 축제에 찾아가서 깽판을 놓았던 고대생 집단성폭력 사건이나, 기업의 고질적인 접대문화도 같은 맥락에 있다.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 없이 노는 법을 알지 못하고, 여자들끼리 노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인격적인 존재로 존중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서 적응해가고 있던 친구가 울면서 전화를 했었다. 거래처 사람들과 회식을 하고 노래방에 가서 즐겁게 놀고 있는데, 나잇살 먹은 부장이 옷 속에 돈을 넣으려 했다면서. 한 개인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모멸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저런 이야기들을 너무도 많이 알고 있다. 그보다 더 익숙한 것은 사건 후 이어지는 침묵과 해결되지 않는 상황, 피해자의 고립, 성폭력 피해에 언제나 아둔한 잔인함을 발휘하는 사회이다.
어린 소녀에서부터 할머니까지 여성을 상대로 한 끔찍한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미친놈, 싸이코패스라고 이야기되는 가해자들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무딘 성폭력 감수성을 보여주는 다른 얼굴일 뿐이다. 기자 가슴을 만진 정신 나간 최연희 씨가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시절 했던 성희롱 발언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성폭행범은 피해자가 청바지를 입었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고, 진보적인 시민 사회 단체에서도 성폭력 가해자들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성폭력을 사소한 것이나 혹은 너무나도 극악무도한 어떤 것으로 보는 두 가지 시선 모두, 현실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이 체감하는 일상의 폭력과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범죄는 동일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일상의 폭력에 너그러운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공포를 내면화한 채 삶의 순간을 지나가는 법을 배워가고 남성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잠재적 가해자가 된다.
성폭력에 대한 법과 제도의 정비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일상의 문화를 바꾸어나가는 움직임이 더욱 중요하다. 여성들의 경우 피해를 입었을 때 물질적-정신적으로 도움과 지지를 줄 수 있는 네트워킹이 필수적이다. 남성들은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들을 성애화된 대상이 아닌 동료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민감하게 문제제기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삶의 국면 속에서 바뀌는 자신과 타인의 역할을 교육하고 성찰하는 것만이 '성폭력 권하는 사회'의 오명을 벗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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