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정교 분리를 엄격히 규정하는 나라다. 그러나 종교와 일상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다. 세계적으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신도를 거느린 대형 교회가 여러 곳일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 집단을 거론하는 뉴스는 늘 사람의 눈길을 끈다.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던 특정 교회 신도를 중용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과연 한국의 종교가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예를 들어 한때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생명공학을 둘러싼 윤리 논란이 그렇다. 외국의 기독교계가 생명윤리를 아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계는 사실상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일부 불교계는 생명공학의 강력한 지지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신도들이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는 일도 있었다. 테러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이런 선교 여행이 '기독교 패권주의'라고 교계 안팎에서 강하게 비판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사건과 맞물려 "신은 망상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외국 지식인의 책이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21세기의 세계를 살펴보면 더욱더 상황은 복잡하다. 현대 사회를 과학기술시대라고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 또한 계속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이 시대의 두 가지 화두라고 할 만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단초를 찾아볼 생각이다. 이 쉽지 않은 작업에 김윤성(종교학자,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신재식(목사, 호남신학대 조직신학과 교수), 장대익(진화론을 연구하는 과학철학자,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세 사람의 젊은 지식인이 나섰다. 이들은 이미 지난 2006년 말부터 과학과 종교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해왔다. <프레시안>과 과학 전문 출판사 사이언스북스는 공동으로 이 서신을 정리해 <프레시안>에 1주일에 한 차례씩 싣는 기획을 마련한다. 이 기획을 통해 독자들은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국내외 최신 담론을 접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장 교수와 신 교수는 각각 과학자와 종교인의 입장에서 서로를 탐색하는 편지를 교환했다. 장 교수가 '과학기술 시대에 과연 종교의 존재 이유가 있는지'를 따지자, 신 교수는 '과학과 종교가 애초 '이웃사촌'이었음을 강조하며, 종교가 대두되는 배경에는 과학기술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음을 짚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종교학자 김윤성 교수가 제3의 시각을 제기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종교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영혼', '생명 논의와 모호성의 윤리' 등의 논문과 <거룩한 테러>, <다윈 안의 신> 등의 번역서가 있다. 김윤성 교수는 2007년 1월 일본을 여행했다. 이 글의 초고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쓰인 것이다. <편집자> |
장대익, 신재식 선생님께
두 분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엊그제 이곳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해 여기저기 다니느라 이제야 편지를 씁니다.
나가사키는 참으로 독특한 도시더군요. 전통과 근대가 절묘하게 공존하죠. 사찰과 신사도 많지만, 일본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들던 성당이 유독 많습니다. 16세기 서양과의 교역 중심지로서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곳이자 수만 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죠. 서양 고딕 양식의 성당들도 인상적이지만 순교자 기념관과 오우라 성당 그리고 우라가미 성당(피폭 마리아 성당)에서 보았던 독특한 성모 마리아 상들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천주교 전래 초기에 관리들이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했던 마리아 상은 죽음을 기꺼이 감내할 정도로 강렬한 신앙의 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합니다. 또 품에 안긴 아기 예수만 아니라면 불교 유물로 착각할 정도로 영락없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한 마리아 상은 새로운 종교의 수용 과정에서 벌어진 절묘한 혼합의 양상을 보여 주죠. 그리고 원폭 투하 이후 남은 잔해 그대로 모셔진 마리아 상은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였던 일본인들의 역사와 경험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불교와 신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일본의 종교 문화 전반을 생각하면 서양 문화와 종교가 어우러진 이곳 나가사키는 정말 독특한 도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한 통계: 일본과 한국의 종교 문화
장 선생님이 말씀하신 미국의 종교 통계 이야기를 읽다 보니 일본의 통계가 생각나네요. 몇 년 전 일본 문부성이 종교별 집계 자료를 종합한 통계에 따르면 각 종교별 신자 수는 신도 1억1700만 명, 불교 9000만 명,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한 기독교 150만 명, 각종 신종교 11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종교인 수가 무려 2억2000만 명으로 일본 총인구 1억2500만 명의 거의 두 배에 달하죠.
그런데 최근의 센서스 조사는 이와 좀 달라서, 이에 따르면 신도 6800만 명(54.1%), 불교 5000만 명(40.5%),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 9000명(0.7%), 신종교 및 무종교 포함 기타 600만 명(4.7%)으로 나옵니다. 1인당 1개 종교만 택하게 한 후 백분율로 환산한 센서스 통계가 정확해 보이기는 하지만, 일본 종교 문화의 실상을 잘 보여 주는 건 오히려 문부성 통계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종교를 절대 진리에 대한 신앙의 문제로 여기고, 따라서 사람마다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또 한 사람이 하나의 종교만 갖는다거나 하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에 성립된 서구적 종교관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극소수의 기독교인과 무신론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때로 신사에 가서 축원을 올리거나 부적을 사고 때로 사찰에 가서 기원을 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죠. 그들에게 종교란 절대 진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그저 삶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상의 일부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본과 아주 비슷합니다. 문화관광부가 2002년도에 각 종교별 집계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통계에 따르면, 불교 3749만 명, 개신교 1872만 명, 천주교 422만 명, 유교 600만 명, 천도교 100만 명, 원불교 133만 명, 대종교 47만 명, 기타 종교 1286만 명으로 종교인 수가 무려 82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총인구의 1.5배나 되는 수치죠.
반면에 2005년 국내 센서스 조사를 보면 '종교가 있느냐?'라는 물음에 '있다.'라고 답한 사람은 53.1%인 2500만 명, '없다.'라고 답한 사람은 46.9%인 2200만 명입니다. 종교별로는 불교 1070만 명(22.8%), 개신교 860만 명(18.3%), 천주교 510만 명(10.9%), 유교 10만 명(0.2%), 원불교 13만 명(0.3%), 기타 종교 25만 명(0.5%)이고요. 미국이나 일본은 물론 그 어느 나라에 비해도 무종교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지요. 사회주의 국가들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자신이 무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나라일 겁니다.
이 통계들은 우리나라 종교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첫 번째 통계에서 총인구의 1.5배나 되는 종교인 수는 한 사람이 여러 종교를 동시에 갖거나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개종하는 일이 매우 잦음을 말해 주죠. 두 번째 통계에서 의아스러운 점은 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무종교인들이 과연 정말로 종교와 무관한 삶을 살까 하는 점입니다.
갤럽 조사를 보면 실제로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 사람이 90%가 넘고, 정식 신자는 아니어도 이따금 사찰이나 성당 또는 교회에 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학자는 이들을 '실천적 유교인', '실천적 불교인', '실천적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뿐이 아닙니다. 굿을 하고 점을 보는 일, 택일을 하고 사주와 궁합을 보는 일, 연초에 토정비결을 보는 일, 풍수지리를 따지는 일 같은 것은 현대 들어 줄거나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성행하고, 또 새로운 세계인 사이버 공간에서 더욱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무종교라고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도 대개는 어떤 형태든 특정한 종교적 신앙과 실천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제가 종교 통계 이야기를 꺼낸 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과학과 종교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과학과 종교는 둘 다 진리의 문제로 씨름하죠.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가 서로 상충하는지 아니면 상호 보완적인지가 두 영역의 만남을 논의하는 많은 이들의 관심거리일 겁니다. 하지만 관점을 좀 달리해서 보면 이런 관심 자체는 과학과 종교를 진리 체계로 파악하는 특정한 세계관 안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종교를 그저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의 일부로 여긴다면 과학과 종교의 관계 따위는 별다른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거죠.
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서구적 종교관과 과학관의 영향 속에서 살고 있고, 따라서 많은 이들이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기독교는 물론 불교와 신종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 신자들이, 또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꼭 이렇게 종교와 관계된 사람들만이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닌 듯합니다. 실제로 특정 종교의 신자가 아닌데도 이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생각건대 이는 방금 종교 통계에서 보았던 것처럼 설령 무종교를 표방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 성격의 신념이나 실천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설령 특정한 종교가 없더라도 일반적 차원에서 종교와 과학이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제법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겠지요.
결국 과학과 종교의 문제는 비단 과학이나 종교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식과 진리 자체나 이를 둘러싼 담론에 일말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
세속적 종교학의 자리: 즐거운 불가지론
종교 통계 이야기는 이쯤 하고, 두 분 편지를 읽으며 들었던 제 나름의 생각을 몇 자 적어 볼까 합니다. 과학과 종교라…. 아무래도 저는 애초에 두 분과 출발점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두 분은 각자 과학자와 종교인의 자리에 서 계시지만, 저는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간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애매한 제3의 자리랄까요.
아시다시피 종교학이라는 학문은 (적어도 제가 하고자 하는 종교학은) 진리나 신념 자체에 헌신하기보다는 이를 둘러싼 담론과 그 효과를 분석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둡니다. 어쨌거나 앞으로 저는 그저 제 나름의 자리에서 두 분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제 나름의 이야기를 덧붙여 보려고 합니다.
과학과 종교에 관한 제 관심은 그 성격이 계속 변해 왔습니다. 학창 시절에 저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보수적 신앙의 개신교인으로서 창조 과학을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죠. 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시에 저는 창조 과학을 진정한 진리로 옳다고 여겼다기보다는 그것이 옳으니까 믿어야 한다고 여기고 또 그렇게 믿으려 부단히 애썼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헛된 분투를 그만두게 되었죠. 지식이 쌓일수록 제 이성이 점점 신념을 과학으로 여기던 오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제 신앙은 보수와 진보의 중간쯤 되는 신정통주의를 거쳐 진보적인 자유주의 개신교로 옮겨 갔는데요, 그러면서 우주와 진화에 대한 현대 과학의 견해를 제 종교적 신앙과 조화시키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문자에 얽매이지 않을 때 신앙이 얼마나 더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깨달았던 거죠.
하지만 저는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저는 종교학을 계속 공부하면서 종교적 진리에 관련된 주장과 담론이란 얼마나 다양한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다양성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태도 역시 다양하죠. 모든 진리가 부분적이라는 신념 아래 자신의 종교만큼이나 다른 이들의 종교도 소중히 여기며 신앙을 지켜가는 종교학자도 많고, 이와는 좀 다르게 특정 종교의 신자로 남기보다는 여러 종교들을 초월하는 궁극적 진리와 성스러움 자체를 인정하며 이를 추구하는 종교학자도 많습니다. 한편 불가지론 내지 무신론적 입장에서 진리 자체에 대한 문제보다는 진리를 둘러싼 담론과 권력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학자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애초에는 첫 번째 입장이었다가, 점차 두 번째 입장으로,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입장으로 계속 옮겨왔습니다. 문자주의적 개신교인에서 자유주의적 개신교인으로, 다시 개신교를 비롯한 개별 종교들을 넘어 종교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종교학자로, 그리고 종국에는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색채를 띤 불가지론적 입장의 세속적 종교학자로 계속 변모해 온 거죠.
앞으로 제가 어떻게 또 변해 갈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비록 제가 유신론적 종교와 다소 거리를 두게는 되었지만, 그렇다고 무신론으로 전향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아마 쉽게 그렇게 될 것 같지도 않고요. 저에게는 무신론도 어차피 특정한 형이상학적 신념 체계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신념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저는 양자택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당분간은 불가지론적 거리두기가 선사하는 지적 모험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아무튼 제 입장이 이렇기에 저는 과학이든 종교든 '진리'의 차원에서 접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분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진 입장에서 제 나름의 물음을 던지고 또 답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두 분 사이에서 중재를 하거나 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사실 그러고 싶은 생각도 그럴 만한 능력도 없고요. 신념의 차이를 중재하는 거간꾼 노릇을 하던 과거의 종교학은 오늘날 혹독한 비판의 칼날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념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순간, 이미 엄밀한 학문에서 신앙적 고백으로 자리를 옮긴 셈이기 때문이죠.
오늘날 종교학이 그런 거창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포부를 간직한 종교학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를 종교학의 세속화로 염려하는 종교학자들도 많지만, 종교학이 진정한 학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극히 당연한 변화로 반기는 종교학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중의 한 명이고요. 아무튼 제 이러한 입장을 이해하시고, 두 분의 대화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음악, 과학, 종교: 모호성의 지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저도 읽고 있는 중입니다. 잠시도 손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책이더군요. 독창적이기보다는 엄청나게 많은 기존 논의들을 집약해서 대중적으로 잘 소화되게 정리한 내용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책 전반에 깔린 도킨스 특유의 신랄한 독설과 명쾌한 주장이 나름대로 매력을 지닌 책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세부터 근대까지 많은 이들이 관여했던 신 존재 증명 시도들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는 그의 논의는 조금은 진부해 보입니다. 그의 논의는 사실 기존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죠. 철학과 신학을 조금이나마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그가 말하는 내용들이 그리 새로울 게 없다는 점을 금세 알 수 있을 겁니다.
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나쁜 일들을 비판하는 부분도 그리 참신하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다른 많은 이들이 제기했던 기존의 비판들을 한데 모아서 소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해 보입니다. 종교와 폭력이나 종교와 전쟁에 관한 책들을 들추어 보면 이 역시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도킨스의 무신론적 입장도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죠. 무신론을 세계적 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는 그의 시도 자체는 새롭지만, 무신론이란 사실 나름의 역사를 지닌 오래 된 신념의 하나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무신론자들이라고 할 만한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학파는 무려 2500년 전에 활동했죠.
어쨌거나 그래도 도킨스의 책은 아주 흥미롭게 읽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는 이 책에 도킨스 특유의 명쾌함, 미래 세대에 대한 그의 염려, 인류에 대한 책임감이 여실히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도킨스는 책의 서두를 '종교적'이라는 말을 되짚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를 가진 당신들이 '종교적'이라고? 좋다. 그럼 어디 한 번 과연 누가 더 종교적인지 겨루어 보자! 이 대목에서 그는 아인슈타인의 종교 정의를 빌려옵니다.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의 이면에 우리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오직 간접적으로만 또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저는 종교학을 하면서 종교에 관한 많은 정의들을 보았습니다만, 아인슈타인의 이런 종교 정의가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하지는 말아야 할 겁니다. 아인슈타인의 종교 정의는 언뜻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와 관련된 종교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고, 따라서 그가 특정 종교를 초월하지만 나름대로 일정한 종교적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도킨스가 잘 밝혔듯이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어떤 특정한 종교를 지닌 과학자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는 엄연한 무신론자였고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범신론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렇기에 아인슈타인을 인용하는 도킨스는 단지 종교를 가진 사람만 종교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신비와 깊이를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종교학의 거장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년, 루마니아 태생의 미국 종교학자, 소설가. 성스러움에 관한 독특한 이론으로 20세기 후반은 물론 지금까지 세계 종교학계, 종교계,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 필자)가 생각나는군요. 종교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도킨스의 견해는 인간을 성스러움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존재로 보고, 따라서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종교적 인간)'라고 본 엘리아데의 견해와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엘리아데는 성스러움을 초월적 실재의 현현으로 본 반면, 아인슈타인과 도킨스는 그런 실재 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상 종교에 대한 양측의 견해는 완전 딴판입니다. 저는 종교학도로서 오랫동안 엘리아데의 견해를 받아들여 왔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초월적 실재로서 성스러움을 승인하고 말고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이를 학문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종교학은 엄밀한 학문이 아닌 일종의 종교적 교의로 탈바꿈하기 때문이죠.
물론 엘리아데의 논의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며,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이 점에 주목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제 은사이신 정진홍 선생님은 엘리아데의 성스러움이 객관적 실재가 아닌 인간 의식 속의 경험적 실재일 뿐이며, 따라서 그가 성스러움의 초월적 실재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보시기도 합니다. 글쎄요. 멋진 해석이기는 합니다. 분명 타당한 면도 있고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엘리아데에 대한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엘리아데가 학계나 대중에게 널리 수용되는 까닭은 전혀 다른 데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엘리아데의 인기의 비결은 그가 초월적 실재로서 성스러움 개념을 토대로 개별 종교를 초월하는 모종의 보편적 종교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엘리아데가 학자라기보다는 작가이고, 종교학자라기보다는 새로운 종교적 비전에 헌신하는 사제나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아온 핵심 이유입니다. 또 그의 이러한 종교적 비전이 그의 정치적 성향, 즉 청년기의 우파 민족주의와 평생 동안의 반공주의, 반셈족주의,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된다는 비판도 줄곧 제기되어 왔습니다. 어쨌거나 이러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엘리아데 자신의 사상이나 그에 대한 해석들을 떠나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엘리아데의 인기는 그 자체로 일군의 추종자를 거느린 독특한 현상이, 사실상 거의 종교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엘리아데와 아인슈타인 중에서 굳이 고르라고 한다면, 비록 제가 종교학도이기는 하지만, 엘리아데보다는 아인슈타인의 종교 정의를 택할 것 같습니다. 종교성의 의미에 대한 그의 언급은 명료하면서도 매력적이죠. 물론 어디까지나 그를 종교인으로 오해하지 않는 한에서 말입니다.
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해답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든 종교적이라는 일반적인 견해를 전면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엘리아데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은 호모 렐리기오소수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왜 굳이 여기에 '종교적'이라는 표현을 붙여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서 때로는 종교에서 얻는 감동보다도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음악에서 얻을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때에 흘렸던 회개의 눈물보다는 음악을 들으며 흘렸던 감동의 눈물이 조금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한때 저는 이렇듯 서로 비슷하면서도 통하는 종교적 감동과 음악적 감동의 근원적 상관성을 밝히기 위해 이들의 관계를 성스러움과 관련된 언어로 풀어내 보고픈 바람도 있었습니다. 호모 무지쿠스(Homo musicus, 음악적 인간)란 결국 호모 렐리기오수스와 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그런 시도를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그만 제 생각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음악의 힘과 감동을 설명하는 데 굳이 성스러움이니, 종교적이니 하는 언어가 필요할까? 그저 우리 몸과 숨결의 리듬, 소리의 힘, 침묵의 깊이 같은 것들로 설명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인간이란 실로 호모 무지쿠스죠. 또 호모 파베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호모 무지쿠스나 호모 파베르가 호모 렐리기오수스와 등가인 것은 아닙니다. 전자는 의미와 가치를 배제한 중립적 술어인 반면, 후자는 릴리지온에 대한 특정한 의미와 가치평가를 담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죠.
갑자기 웬 종교와 음악 이야기인가 좀 의아스럽겠지만, 실은 제가 과학과 종교에 대해 하고픈 이야기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누구든 그레고리안 성가나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감동할 수 있는 것은, 그 음악들이 종교적 성격을 지니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의 내면에 일정한 종교적 성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음악 자체가 본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을 지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과 종교는 제각기 나름의 영역이 있고, 또 서로 중첩되는 영역도 있습니다.
주제를 옮겨 과학과 종교로 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분명 진리를 둘러싼 각기 나름의 영역이 있지만, 서로 중첩되는 많은 부분이 있기도 하죠. 그렇기에 저는 스티븐 제이 굴드 식으로 깔끔하게 두 영역을 분리해 버리는 입장에도, 그렇다고 과학과 종교의 대화나 융합을 꿈꾸는 대부분의 이 분야 학자들의 입장에도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굴드의 입장은 지나치게 편리하지만, 과학과 종교의 중첩지대를 설명하지 못하죠. 또 대화나 융합을 말하는 이들은 과학과 종교가 끝내 다른 부분이 더 많다는 점을 애써 무시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과학적 진보가 곧 종교의 위축 내지 소멸을 가져오리라는 도킨스 식의 다소 과장된 기대도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오늘날 종교의 영향력이 오히려 더욱 증대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도킨스의 기대는 그저 무신론자의 몽상의 불과할지도 모르죠.
이러한 입장들과 구분되는 어떤 또 다른 입장이 가능할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는 길이 분명 이들과는 다른 길이라는 점밖에는 아직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음악과 종교를, 또 과학과 종교를, 서로 별개이면서도 중첩되는 미묘한 뉘앙스로 가득한 이들의 관계 영역을 명확한 인식의 언어로 서술해 낼 수 있겠지요.
부모가 자녀에게 종교를 전해 주는 건 폭력이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습니다. 다시 <만들어진 신>으로 돌아와서 또 다른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이들에게 부모의 종교를 강요하지 말라는 도킨스의 권고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깊이 새겨들을 만한 점은 있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엄마 아빠는 교회 다녀올 테니까. 너는 집에서 게임하거나 텔레비전 보고 있으렴.' 하고 말할 부모가 과연 있을까요? 또 그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요?
제가 보기에 도킨스의 생각은 분명 의미심장하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로 너무 나아갔다고 보입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옳다고 믿는데, 그 옳은 것을 자녀에게 전해 주고 싶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요? 그것이 특정한 이념이든 또는 특정한 종교든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부모라면 자녀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해 주고픈 바람을 갖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죠.
정작 도킨스 자신도 그의 딸에게 전통이나 권위, 그리고 그 핵심 기제인 종교에 의존하지 않는 삶의 가치를 전달하려 애쓰지 않던가요? 그의 <악마의 사도(A Devil's Chaplain)>(2003년)에 실린,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납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딸이 부활절에 교회에서 달걀을 받아오거나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구워놓고 감사 기도를 올리거나 친구들과 마녀 분장을 하고 핼러윈 파티를 즐기거나 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가르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점에서 도킨스 역시 자신의 신념을 자녀에게 전해 주고 싶어 하는 다른 부모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다른 부모들이 전해 주려는 것이 '종교'라는 게 불만인 거죠. 그가 보기에 '종교'는 명백히 잘못된 나쁜 신념 체계이니까요.
도킨스의 의도는 자명합니다. 그가 꿈꾸는 세상, 모든 이들이 종교의 망상으로부터 해방된 세상을 이루려면 아이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 특정 종교의 틀 안에서 양육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도킨스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작 아이들이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아이들은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이며, 언젠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잠재력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오히려 도킨스야말로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부모의 종교를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자라면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나름대로 선택할 기회를 가질 권리겠지요. 설령 어려서 부모에게 특정한 종교를 물려받았더라도, 성장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자유를 실현하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실제로 어려서 똑같은 종교적 환경에서 자랐어도 어떤 이는 독실한 신자가 되는 반면 어떤 이는 종교에 적대적이 되거나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비록 어린 시절의 종교적 환경이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해도, 그 영향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렇기에 애초에 자녀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해 주려는 부모들의 바람 자체에 대해 도킨스처럼 이를 자녀에 대한 권력 남용이나 폭력으로 매도하는 건 지나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자녀를 향한 부모의 순수한 사랑마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이 점에서 저는 자기가 딸에게 물려주려는 합리적 신념만 옳고 다른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주려는 종교적 신념은 다 틀렸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도킨스가 너무 오만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더욱이 실제로 수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의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그 어떤 종류든) 신념을 물려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는 점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자명한 현실지요. 따라서 이를 간과한 도킨스의 주장은 다분히 현실성이 없습니다. 물론 이렇듯 과격한 주장을 하는 도킨스의 심정적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아이들이 단일한 사고에 갇히지 않고 충분한 다양성을 접하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열린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겠지요.
종교와 과학 논의 엿듣기: 지적 유희와 타산지석
신 선생님의 편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많이 배웠고요.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기나긴 논의의 역사를 정말 잘 정리해 주셨더군요. 특히 과학과 종교를 갈등 관계로 보는 견해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과장된 이미지일 뿐이라는 점에 대해 설명하시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또 과학과 종교의 지식이 구성적이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생태 문제 같은 새로운 이슈가 불거지면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설명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 선생님 편지를 읽다 보니, 과학과 종교 논의란 결국 특정 종교의 문제이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신 선생님이 소개한 기관, 인물, 저술은 사실상 이 분야를 대표하고 또 사실상 거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이안 바버가 <과학 시대의 종교(Religion in An Age of Science)>(1989년)에서 과학과 종교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에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고 지적했듯이, 지금의 과학과 종교 논의는 주로 기독교와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야 종교학을 하는 입장에서 다른 종교들에서 이루어져 온 과학과 종교 논의에도 관심이 많지만, 그런 논의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우주 물리학과 진화 생물학 같은 현대 과학을 화엄경 같은 불교 경전과 결부시키려는 불자 과학자나 불교학자, 또는 자신들의 교리가 얼마나 과학적인지를 증명하려 하는 신종교 신자를 간혹 본 적은 있습니다만, 사실 이런 시도들은 어딘지 어색하게만 느껴집니다. 종교와 과학을 어느 한쪽의 틀에 또는 서로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는 점에서 창조 과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방향이 정반대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시도들에서 감지되는 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화된 과학이 아닐까 합니다. 과학이야말로 현대의 절대 기준이자 가치이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맞추어야 종교가 살아남으리라는 강박적 사고 말입니다. 이런 시도에는 사실상 과학을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수정되며 발전해 가는 과정으로 보기보다는 이미 확립된 불변의 교의처럼 여기는 경직된 신념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가 과학과 종교에 관해 논의하면서 이런 식의 견해들까지 다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로 서양에서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져 온 논의만 남게 되겠지요. 종교학자로서 이는 좀 아쉬운 점이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감안해야 하는 한계 같습니다. 다만 비록 기독교 위주의 논의라 하더라도, 좀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로 풀어서 다시 생각하려는 노력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드렸던 책 기억하시죠. 제가 번역한 미국 가톨릭 신학자 존 호트의 <다윈 안의 신(Deeper than Darwin)>(2003년)이라는 책이요. 당시에 저는 우주와 생명의 진화에 대한 현대 과학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신학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호트의 논의에 매력을 느꼈고, 그래서 번역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신앙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호트의 논의가 매우 설득력 있고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에 흥미를 느꼈던 건 호트의 논의에 전적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펼치는 논의의 치밀함에 탄복하고, 그가 과학과 종교의 텍스트 외에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인용하며 펼쳐내는 이야기, 우주와 생명, 신과 인간,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지닌 우아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유일신을 전제하고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풀어내려 애쓰는 기독교인들의 다양한 논의를 곁에서 엿듣는 일은 그 자체로 즐거운 지적 작업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다른 어떤 종교와 관련해 이루어지는 종교와 과학 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논의들을 타산지석 삼아 종교와 과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각자의 시각을 조금씩 다듬어갈 수도 있겠지요.
나름대로 몇 자 써 보았습니다만, 제 글이 두 분의 편지에 대한 답변이 되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이나 대화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까닭은 결국 우리 삶에는 서로 구분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 복잡하고 모호한 중첩 지대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종교는 그러한 중첩 지대의 어디쯤엔가 놓여 있겠지요. 과학과 종교에는 진리의 문제를 둘러싼 나름의 독립된 영역이 있고, 또 서로 중첩되는 많은 영역이 있습니다.
종교로부터의 해방과 종교의 궁극적인 소멸을 꿈꾸는 무신론자든, 과학과 종교의 대화나 융합을 꿈꾸는 종교인 과학자와 신학자와 평신도든, 또 과학과 종교를 아우르며 넘어서는 언어를 통해, 우주와 그 너머를 상상하는 인간에 대해 새롭게 서술해 내기를 꿈꾸는 종교학자든, 결국 모두가 과학과 종교가 서로 나뉘면서도 겹치는 그 모호성의 지대를 탐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새벽이네요. 오늘 규슈 남부로 이동하는데 신칸센 안에서 정신없이 졸게 생겼습니다. 조금이라도 자 두어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2007년 1월 15일
나가사키에서
김윤성 드림.
독자 기고를 받습니다! <프레시안>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독자 여러분이 참여하길 희망합니다. 장대익, 신재식, 김윤성 교수가 주고받는 글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보내준 견해는 한 달에 한 번씩 세 분 필자와 똑같은 비중으로 <프레시안>에 게재됩니다. (의견 보내실 곳 : tyio@press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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