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저녁 서울 교보빌딩 앞에서 '고 김선일 추모 파병철회 범국민의 날' 촛불집회가 열렸다. 태풍 '민들레'의 영향으로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시민 3천여명이 참가해 '이라크 파병반대, 노무현 정권 규탄'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병철회의 여론을 이어갔다.
이날 촛불집회에는 특히 지도부의 '온건한 대응'에 대한 비판과 함께 노사모 등이 '파병철회에는 동의하지만, 노무현 정권 모욕에는 반대한다'는 식으로 노 정권을 옹호하기도 해 이전 대회와는 색다른 양상이 연출됐다.
***빗 속 파병철회 촛불집회, 3천여명 일반 시민 참가**
비가 내려 무대준비에 차질이 생겨 저녁 8시에야 시작된 이날 촛불집회는 빗속에도 불구하고 3천여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첫 연사로 나선 정광훈 전국민중연대 상임대표는 "정부가 죄없는 선일이를, 국민을 죽였다"며 "이 사건은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작품이다"라고 말해 미국과 정부가 공범임을 주장했다. 정 대표는 이어 "현 정부는 이미 부도가 났다"며 "국민이 직접 결산 처리하기 전에 반성하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 이라크에서 무장세력의 공격을 받고 숨진 오무전기 직원 김만수씨의 딸 영진(19)씨도 무대에 올라 "지난해 아빠가 죽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김선일씨의 죽음을 보았다"며 "내가 아빠 장례식 때 똑같은 일이 생길거라며 파병은 절대 안된다고 했었다. 정부는 국민의 말을 무시했다"며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파병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의 절규는 어떤 이의 호소보다 절박했다.
***노사모, "노 정권 모욕하는 집회는 싫다"**
끝없이 내리는 비속에서도 노랑·파랑 등의 우비를 입고 젖은 아스팔트 바닥에 앉어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비를 막으면서 집회 참가자들은 연사와 공연에 집중했다.
파병집회 단골손님인 가수 손병휘씨와 '천지인' 녹색연합 활동가 노래패 '참 좋다 솔바람'등이 나와 파병철회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했다.
이밖에 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대학 선배라고 신분을 밝힌 김광수 '청년필름'대표는 "사랑하는 후배 종석아, 너의 조국가 민중에 대한 사랑, 반전평화의 의지를 믿는다"며 "우리, 명분 없는 침략 전쟁에 동조하는 것만은 막아보자"고 호소했다. 또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도 "요즘 외국에 나가면 '이라크에 파병한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며 "11살 된 내 딸아이를 전범으로 만들지 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그동안 보이지 않던 노사모 회원들도 이날 집회에 노란 우비를 입고 참가했다. 그들은 '파병반대, 전쟁 반대하는 나는 노빠다. 그러나 노 정권 모욕하는 집회는 싫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여 주목받기도 했다.
집회 마지막 쯤에는 지도부와 집회 참가자들 사이 갈등이 발생했다. 이날 대회를 주관한 파병반대국민행동이 밤 10시께 투쟁결의문 낭독을 하고 청와대와 미대사관 앞으로 행진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찰의 봉쇄로 인해 사실상 행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 국민행동 측이 밤 10시 30분 경 공식 행사 종료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아침이슬이나 부르며 파병철회를 주장할 건가" 일부 참가자 직접행동 요구**
주최 측의 행사 종료선언에 대해 일부 참가자들은 "언제까지 '아침이슬'이나 부르면서 파병을 철회하라고 하느냐"며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촛불집회가 경찰이 설정해준 안전 라인 안에서 '조용히' 집회를 마무리하던 양상과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김선일씨 피랍·피살 사건으로 파병철회와 강행의 여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파병철회를 촉구하는 측은 좀더 강도 높은 '직접행동'을 요구하고 있으나, 정작 이를 견인해야 할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던 한 시민은 "정부·국회에서 여전히 파병강행에 대한 뜻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병철회운동 역시 질적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파병철회하지 않는다면 정권퇴진도 각오해야"**
한편 의사, 약사, 한의사, 보건의료 계열 학생들로 구성된 보건의료단체연합 등 5개 보건의료단체 회원 1백20여명도 5시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파병 철회를 촉구했다. 특히 70여명의 회원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집회에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의료인의 이름으로 파병 철회를 요구한다"며 "1987년 의료인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하얀 가운을 입고 거리로 나선 것처럼 한국인의 전체 생명을 위험으로 몰아놓는 추가 파병에 반대하기 위해 다시 흰 가운을 입고 거리로 나섰다"고 의미를 밝혔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 실장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이 여기는 보건의료인으로서 전쟁으로 사람이 죽고 나면 우리의 역할은 없다"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대통령의 책임이라면 이미 노무현 대통령은 자격을 상실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건의료 단체 회원들은 "노무현 정권이 파병을 철회하고 서희·제마 부대를 즉각 철수하지 않는다면 정권 퇴진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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