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 역사에는 숱한 명장면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적어도 두 장면은 이 선수와 관련이 있다. 홍명보 현 올림픽 대표팀 코치가 주장이 되기 전 한국 대표팀의 대형 수비수로 주장 완장을 찼던 정용환 전 양주시민구단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32년만에 월드컵 진출 물꼬를 튼 '정하라'
32년 동안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가지 못했던 한국 축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한국의 86 멕시코 월드컵 예선 마지막 걸림돌은 일본.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첫 판을 치러야 했다. 경기 전부터 김정남 감독은 수비의 핵 정용환을 '정하라'라고 불렀다. 일본의 스트라이커 하라를 철저하게 대인마크 해야 한다는 뜻에서 그랬다. 김 감독은 "경기 중에 하라가 화장실을 가도 넌 쫓아가야 해"라고 지시했을 정도로 하라를 봉쇄하는 데 주력했다.
팽팽한 두 역사적 라이벌의 긴장감을 일시에 깨버리는 첫 골은 우연히도 수비수 정용환의 몫이었다. 정용환은 "하라가 수비하느라고 일본 진영으로 많이 내려갔죠. 그래서 나도 쫓아갔어요. 그런데 공이 내게 연결되더라구요. 그냥 맞춰야 되겠다는 생각에 발만 살짝 댔는데 정확히 공에 맞아 골이 됐어요. 감독님 지시를 잘 따라서 행운이 온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한국은 이 원정경기에서 2-1로 이기고, 잠실 주경기장에서 펼쳐진 경기에서는 허정무 현 국가대표팀 감독의 결승골로 월드컵 본선에 나가게 됐다.
월드컵 본선에 나갈 때 정용환은 수비수로서 걱정이 앞섰단다. "같은 조에 이탈리아, 아르헨티나가 있는데 10골 이상 우리가 내주면 어쩌나 고민도 많이 했어요. 아르헨티나랑 첫 경기 하기 전에는 긴장도 많이 했어요. 상대가 마라도나라는 말에 입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어요. 참 그때 생각하면 대표팀 멤버가 상당히 좋았는데 월드컵 출전 경험만 우리가 있었어도 16강 갔을 것 같아요. 불가리아와의 무승부, 이탈리아와의 마지막 경기가 너무 아쉬웠죠. 다들 제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어요. 상대 팀에 대한 정보도 많이 부족했구요".
정용환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만든 평양
하지만 32년만에 나간 멕시코 월드컵보다 정용환을 더 긴장시켰던 경기가 있었다. 90년 남북통일축구 평양 원정경기가 바로 그 시합. "그때가 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축구가 3위를 했을 때에요. 대회가 끝나자마자 평양을 가야 한다는 거에요. 보안교육을 받는 중에 피곤에 지친 선수들이 꾸벅꾸벅 졸았죠. 보안교육을 받으면서 조금씩 "우리가 남북대결을 하게 됐구나"그런 느낌이 들더라구요".
정용환은 평양 순안 공항에 내릴 때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느낌이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 올 때부터 환영인파가 시쳇말로 장난 아니었어요. 버스를 타고 숙소인 고려호텔로 가는데요. 아시죠? 마라톤 경기하면 연도에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울고 펄쩍펄쩍 뛰는 거에요. 저게 쇼인지 실제 상황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저도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구요". 당시 주장이었던 정용환이 북한 선수와 같이 손을 들고 경기장에 입장하는 장면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15만명을 수용하는 능라도 경기장에서 정용환은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매스게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꽉 들어찼는데 분위기가 압도적이더라구요.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좀 얼었을 거에요. 막상 시합들어 갔는데 주심이 북한 사람이라 좀 편파적이었죠. 북한에 페널티킥을 줄 때 항의하려는 선수들 말리느라 혼났어요. 최인영 골키퍼가 무언의 항의로 그냥 공을 관중석 쪽으로 찼는데, 갑자기 경기장 분위기가 쥐죽은 것 같이 되더라구요. 다행히 조금 뒤에 매스게임 분위기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가슴이 철렁했죠".
"한국에 있는 차 이곳에 다 모아 놨습네까"?
그는 한국에서의 경기 때는 북한 여자 선수들 때문에 한참 웃어야 했다. "숙소가 워커힐 호텔이었어요. 북한 여자 선수들이 매일 출퇴근 시간마다 차가 막히는 걸 봤나 봐요. 저한테 "한국에 있는 차를 여기 다 모아 놨습네까"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며칠 째 계속 그러니까 북한 여자 선수들도 이런 의문을 더이상 갖지 않더라구요. 북한 여자 선수들은 대회가 끝나고 헤어질 때 많이 울더라구요".
정용환은 "남북 통일 축구대회가 끝나고 북한 선수들 몇 명이 제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몰래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꺼림칙해 단장님이나 다른 분께 얘기했어요. 괜찮다고 했었는데 최종적으로 허락을 받지는 못했죠. 그게 북한 선수들과는 마지막이었어요. 그 친구들 참 맥주도 좋아하고 안주로 김도 좋아했는데 아쉬워요".
영국인들이 창조했다는 '줄 서기 문화'보다 중요한 축구
정용환은 수비수인데도 옐로우 카드가 없었던 희귀종이었다. 하지만 데뷔 9년 차였던 92년에 신기록 행진에 마침표를 찍는다. "상대 공격수가 구상범 선수였나 그랬을 거에요. 서로 대표팀에 있고 해서 잘 알았죠. 제가 먼저 트릭을 써서 등을 졌는데 심판이 진로방해라고 경고를 줬어요. 저는 그 지점이 위험지역도 아니었는데 그냥 파울이 아니라 경고를 주길래 참 어이없었죠. 그 일 뒤로 그 심판이 애를 먹었답니다. 왜 경고 안 받은 선수한테 옐로우 카드를 내미냐구요".
그는 잘 됐으면 잉글랜드 프로축구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 선수가 될 뻔한 사연도 공개했다. "94년 거의 제가 은퇴할 무렵이었죠. 당시 3부리그 팀이었던 풀럼에 메디컬 테스트까지 받은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워크 퍼밋(노동허가서)를 못 받았죠. 한국에서 서류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어요. 뭐 선수로는 못 뛰었지만 2년 간 연수하면서 영국 축구는 실컷 봤어요. 그때 영국 축구가 킥 앤드 러시 스타일에 조금 아기자기한 패싱게임이 접목되기 시작한 시점이었어요. 칸토나, 개스코인 같은 선수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죠".
그는 영국인들이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를 말해줬다. "은행에 가서 계좌를 만들어야 하는데 줄이 너무 긴 거에요.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내가 월드컵에 한국 대표로 뛰었던 정용환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바로 안으로 들어 오라는 거에요. 별 어려움 없이 계좌도 개설했죠. 영국 사람들이 줄 서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들었는데 축구보다 한 수 아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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