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스포츠 팀 가운데 빨강색과 검은색의 유니폼을 입었던 해태 타이거즈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팀은 없다. 그들이 단순히 9번이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 중심에는 그들의 승리를 향한 강한 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해태가 3연패를 달성했던 지난 1988년 한국시리즈서 패장이 됐던 김영덕 감독의 말이다. "전력상으로는 삼성과 롯데가 호적수인데 해태 선수들은 삼성과 롯데 선수들에겐 없는 것을 갖고 있어요. 그건 투지예요. 6차전 때 보니까 선수들 눈에 퍼런 빛이 돌아요. 감독이 이겨라 해서 이기는 게 아니라 선수들이 꼭 이겨야 겠다고 똘똘 뭉쳐 이기는 팀이 바로 해태지요. 아직도 그들에겐 헝그리 정신이 남아 있어요".
실제로 해태 구단은 한국시리즈 성적으로 보너스를 책정했다. 특유의 끈끈한 팀 단결력을 갖춘 해태 선수들은 이같은 구단의 '당근' 정책으로 80년대 프로야구 무대를 휩쓸 수 있었다. '큰 경기에 강하다'는 말도 여기에서부터 나왔다.
1997년 LG와의 한국시리즈. 김응룡 당시 해태 감독은 4번 타자 자리를 놓고 고민했다. 정규시즌에서 4번을 쳤던 홍현우와 이호성 중 누구를 4번에 쓸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김 감독은 정규시즌에서 20-20클럽에 가입한 홍현우 대신 이호성을 택했다. 큰 경기에는 고참이 타선을 이끌어줘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1997년 한국시리즈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의 시리즈였다. 하지만 4차전 만큼은 이호성이 날았다. 이 경기를 앞두고 콧등에 타구를 맞는 부상을 당했던 이호성은 3회초 LG 유지현의 2루타성 타구를 과감한 다이빙 캐치로 잡아 내며 경기의 흐름을 되돌렸다. 5회말에는 1사 1, 2루 상황에서 중전 안타를 쳐냈다. 이병규의 실책까지 겹치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3루까지 내달렸다. 광주 구장을 찾은 해태 팬들은 열광했고, 이 한 장면으로 해태는 경기의 쐐기를 박았다. 부상 등 팀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더 분발하는 해태의 팀 컬러는 이호성에 의해 1997년 다시 한 번 완성된 셈이다. 하지만 그 뒤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정상에 서지 못했다.
엄지 손가락 하나로 벽에 못을 박아버리고 일반인들과 한 손가락으로 팔씨름을 해도 이길 정도로 괴력의 소유자였던 이호성은 90년 해태 입단 당시부터 미래의 4번타자감으로 꼽혔던 슬러거다. 선후배 간의 가교 역할을 하며 해태 특유의 정신을 계승했던 해태의 마지막 주장이기도 했다.
그런 이호성이 결국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현역 은퇴 뒤 추진했던 웨딩사업, 스크린경마 사업의 실패로 몇년 전 부터는 야구인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10일 한강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김모 씨 네 모녀 피살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마포 경찰서는 11일 이호성 씨가 김씨에게 차용한 돈 1억7천만원을 갚지 못해 빚독촉에 시달리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한 야구인은 "이호성이 야구판에 남아 있었더라면 더 뜻깊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소식을 들으니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그라운드에서 그가 호쾌한 장타를 뽑아내며 포효하던 '호성(虎聲)'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야구 선수였던 그에게 '불명예'란 그림자만이 드리워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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