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멕시코 고원지대에서 연출된 박종환 사단의 신화는 사실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북한 축구의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의 난동이 아니었다면.
82년 11월 30일 아시안게임 4강전. 인도 수도 뉴델리의 네루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북한과 쿠웨이트의 경기는 전력상 북한의 우세가 점쳐졌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시아 정상권 수준을 유지했던 북한은 후반 8분 만에 선취점을 얻었다. 하지만 후반 종료 10분전 북한은 아쉽게 쿠웨이트에 페널티킥을 내줬다. 북한 임원들은 태국 출신의 비지트 심판이 페널티킥을 선언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본부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주심을 바꿔달라"고 소리 높였다.
다시 경기는 속개됐다. 피말리는 연장승부에서 승부의 추는 쿠웨이트쪽으로 기울었다. 심판의 종료휘슬이 스타디움에 울렸다. 이 순간 북한 선수들은 이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비지트 심판에게 돌진해 그의 몸과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관중석에 있던 북한 타종목 선수들도 그라운드에 뛰어들었다. 경기장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이미 탈락했던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이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박성화 현 올림픽 대표팀 감독은 "갑작스런 사태에 너무 깜짝 놀랐다. 관중석에 있던 북한의 다른 종목 선수들은 마치 특공대원들처럼 관중석 의자를 허들하듯이 뛰어 넘으며 그라운드로 돌진했다. 그들은 책상도 뒤엎고 의자를 비롯해 눈에 보이는 거는 다 던졌다. 머리에 터번을 한 인도 경찰들은 곤봉을 들고 겨우 이를 진압했다.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회고했다.
박 감독은 "사실 비지트 주심의 판정이 편파적이었다. 북한은 쿠웨이트보다 좋은 경기를 했지만 페널티킥 판정 이후 흐름이 바뀌었다. 이 난동으로 북한 축구에 대한 2년 간 출장정지가 내려졌다는 게 북한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북한 축구가 암흑시대로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축구에 대한 지원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제대회 참가를 차단 당한다는 것은 결국 선수들의 경기운영 미숙으로 연결된다. 박 감독의 말처럼 한국과 거의 대등한 수준에 있었던 북한 축구는 이 난동 사건으로 '휴화산'이 됐다. 징계가 풀린 뒤에도 북한은 경험부족과 단조로운 전법 때문에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북한 난동 사건이 발생한 뒤 이런저런 뒷 얘기들이 많이 나왔다. 당초 쿠웨이트 오일달러에 태국 바지트 심판이 매수됐다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태국 언론은 바지트 심판을 매수하려고 한 것은 쿠웨이트가 아니라 북한이라는 보도를 내놓았다. 태국의 석간 영자지 방콕 월드는 태국 축구협회 부회장 피시트 엔가름파니치 씨의 말을 인용해 "북한 임원들이 내게 접근해, 비지트 주심에게 경기를 유리하게 진행시켜 주도록 부탁했지만 나와 비지트 주심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어느 쪽이 심판을 매수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태국 언론의 보도를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아시아 축구계에서 쿠웨이트의 오일달러는 그만큼 악명 높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한국 축구는 북한 난동 사건으로 선물 하나를 받았다.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아시아 최종예선에 참가할 수 있는 출전자격을 얻은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 동부지역 예선 준결승에서 북한에 3-5로 패했었다. 하지만 북한 축구가 2년간 출장정지 처분을 받자 북한 대신 최종예선 티켓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온 국민을 열광시켰던 박종환 사단의 기적같은 4강신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축구의 '동면기'는 한국 축구의 '새바람'이 됐다. 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쇼크가 70년대 한국 축구의 '국가주의'를 일깨웠다면, 82년 북한의 경기장 난동은 한국 축구가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데 조연 역할을 했다.
안이 밖이 되고 또 밖이 안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묘한 인연을 맺어 온 남북한 축구는 또 어떤 드라마를 만들수 있을까? 남북축구가 새로 만들어야 할 인연이 명암이 엇갈렸던 과거와는 다른 2010 남아공 월드컵 동반진출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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