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과 한나라당에서 전개되는 공천 갈등에도 이런 흔적이 진하게 묻어있다.
한나라당이 없었다면 '박재승 혁명'이 가능했을까?
이렇게 보면 어떨까? 민주당의 '공천 혁명'을 오직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의 뚝심 덕이라고 볼 수 있을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오직'이라는 수식어를 달기는 어렵다. 민주당의 공천 혁명이 박재승 위원장의 뚝심 덕이었다면, 박재승 위원장의 뚝심은 다른 요인 덕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이 공천 배제 대상을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자'로 정하지 않았다면 박재승 위원장의 뚝심이 관철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정상 참작 여지와 당선 가능성을 내세운 저항세력에 막혀 좌초했을지도 모른다. '한나라당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민주당 안팎의 여론이 저항세력을 견제하고 박재승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줬기 때문에 뚝심이 혁명을 낳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제 시선을 돌려보자. 그럼 한나라당은 어떻게 상대게임을 할까? 민주당의 공천 혁명을 개혁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을까?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박재승 위원장의 뚝심을 모델로 삼고 민주당의 공천 혁명을 윤활유 삼아 개혁 공천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공천심사위가 민주당의 경우를 비교사례로 삼아 자율성을 확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론이 현실화하려면 조건이 추가돼야 한다. 민주당과 똑같이 공천심사위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세력과 여론이 조성돼야 한다.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상황이 너무 다르다.
민주당 계파는 대선을 기점으로 해체·약화됐지만 한나라당 계파는 굳건히 서 있다. 민주당은 공멸을 피해야 하지만 한나라당은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민주당은 '우리'를 우선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한나라당은 '나'를 챙기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은 '박재승 혁명'을 지렛대 삼을 수 있을까?
이게 화근이다. 한나라당의 이런 특수성 때문에 개혁보다는 안배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쾌속보다는 만만디 행보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 공존의 틀이 깨지지 않는다. 균열현상을 보여도 틀이 깨지는 최악의 경우를 막을 수 있다.
'봐주기 공천'이 나타나는 이유, '화약고'라 불리는 영남지역 공천 확정 시점을 늦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요인이 있긴 하다. 인수위의 과속과 조각 파동으로 민심이 요동친다고 한나라당 스스로 말한다. 그래서 걱정한다. 이러다가 200석은 고사하고 과반의석 확보도 어렵다고 말한다. 엄살기가 다분한 자가 진단이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 대선 직후의 분위기에 견주면 이상 조짐이 있는 건 분명하다. 한나라당이 목표 의석수를 하나 둘 줄이다보면 위기감에 휩싸일 수 있다.
이런 위기감이 개혁 공천을 다그칠 수 있다. 민주당보다 조금 나은 공천을 이루지 못하면 총선에 밀리게 된다는 절박감이 윤리 공천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요인이 한나라당의 직진을 이끌지는 미지수다. 똑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 위기감이 오히려 계파 공존의 절박성을 키울 수 있다. 만에 하나 한나라당 의석수가 당초 예상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려면 특정 계파를 자극해서는 안 된다. 특정 계파를 자극함으로써 분란의 씨앗을 뿌려서는 안 된다.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해 '소'는 버리고 '대'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보니 한나라당은 또 하나의 상대게임에 빠져있다. 민주당보다 나은 공천이 아니다. 개혁 공천보다 나은 실리다.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한 공존 틀, 이걸 버릴 수가 없다.
* 이 글은 김종배의 뉴스블로그 '토씨(www.tosee.kr)'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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