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0억 원과 1000억 원이 있습니다. 어떤 게 더 큰 수일까요? 유치원생도 압니다. 10억 원은 1000억 원의 1/100에 불과합니다. 1000억 원은 10억 원의 100배에 달합니다.
근데 이상합니다. 10억 원을 두고 너무 많다고 하고 1000억 원을 놓고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액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쪽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말합니다. 1000억 원을 놓고 "주민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분노하고 10억 원을 두고 "사실상 폐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반발합니다.
2.
짐작하셨을 겁니다.
1000억 원은 태안 얘기입니다. 삼성중공업이 '지역발전기금'으로 1000억 원을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10억 원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얘기입니다. 삼성전자가 <프레시안>을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태안 이야기는 많이 알려졌으니까 생략하겠습니다. <프레시안>과 삼성전자에 얽힌 이야기만 잠깐 하겠습니다.
삼성중공업 예인선이 태안 앞바다에서 기름유출사건을 일으키기 10여 일 전인 2007년 11월 26일에 <프레시안>이 기사 하나를 게재합니다. 관세청 자료에 기초해 삼성전자가 2005년 7월 이후 6개월 동안 계열사인 삼성전자로지텍에 수출운임을 통상운임보다 1조 3000억 원 가량 과다지급한 의혹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프레시안>은 이 자료를 기초로, 그리고 전문가의 해석에 근거해 '탈세를 위해 비용 부풀리기를 했을 가능성'과 이렇게 조성된 돈이 '비자금으로 쓰일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확인은 쉽지 않았습니다. 관세청 자료에 기초해 제기한 의혹이 진실인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삼성전자의 회계자료를 들춰봐야 했지만 이 확인작업은 애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프레시안>은 삼성전자에 반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돌아온 얘기는 이것이었습니다.
"영업기밀이므로 밝힐 수 없다."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그러자 삼성전자가 격하게 반발했습니다. <프레시안> 사무실에까지 찾아와 거세게 항의했고 <프레시안>은 이들의 항변 내용을 다시 기사에 담았습니다. 관세청 자료에 기재된 운임은 실제운임과 다르고 국세청에 신고된 운임이 실제운임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반론권을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두 달여가 지난 뒤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0억 원을 배상하라고 요구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제시한 정정보도문을 <프레시안> 초기화면 중앙 상단에 1개월 동안 게재하라고 했고, 이 요구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이행 완료일까지 매일 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습니다.
삼성전자가 이처럼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과격한 요구를 한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브랜드 가치가 훼손됐다!"
3.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프레시안>은 날림취재를 했고 부실보도를 한 게 아닙니다. 객관적 자료에 기초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의혹 보도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예단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반론 기회도 부여했습니다.
왜 객관적인 확인작업을 다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삼성전자의 회계장부를 열람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기업의 회계장부 열람권은 법적으로 엄격히 제한돼 있습니다. 사기업인 터라 정보공개 청구도 할 수 없습니다. <프레시안>이 취할 수 있는 확인작업은 취재내용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당사자의 반론을 경청하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확인을 요청한 <프레시안>에 '노코멘트'로 응대하던 삼성전자가 뒤늦게 소송을 제기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4.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삼성중공업은 기름유출사건이 나고 한참이 지나도록 '미안하다'는 의례적인 인사치레조차 극도로 삼갔습니다. 검찰이 기소를 한 다음에야 짧막한 의견광고를 일부 언론에 게재했을 뿐입니다.
삼성전자는 <프레시안>에게 납작 엎드리라고 강요합니다. 정정보도문을 초기화면 중앙상단에 1개월 동안 게재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삼성중공업의 김징완 사장은 자신들이 "사고를 낸 한 당사자"라고 말했습니다. 과실을 인정한 겁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미안하다'는 그 흔한 말조차 아껴왔습니다.
<프레시안>의 명예훼손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프레시안>의 보도가 공익을 목적으로,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사유에 따라 보도했다고 볼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1개월 동안 무릎 꿇고 반성문을 들고 있으라고 요구합니다.
5.
인정할 수 없습니다.
"브랜드의 가치가 훼손됐다"는 삼성전자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흔히 말합니다. 경제는 심리이고 기업은 신뢰라고 말합니다. 브랜드의 가치는 신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 점을 기준으로 삼으면 브랜드 가치 운운하는 삼성전자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기업에 대한 신뢰는 단지 영업실적만 보고 쌓는 게 아닙니다. 삼성전자가 '회사소개'를 통해 스스로 밝혔듯이 "투명하고 건실한 기업경영"을 하고 "적극적인 사회공헌활동을 펼칠" 때 "존경받는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진행되는 삼성 특검의 수사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10억 원과 1000억 원이 상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물론 삼성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만)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가면서 '폐쇄적인 자기애'를 내보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또 하나의 가족'이 삼성을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기업'이라고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자신들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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