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AIDS 감염인은 나가라?
현행 출입국관리법은 '전염병환자, 기타 공중위생상 위해를 미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외국인을 대한민국 밖으로 강제퇴거시킬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전염병예방법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제3군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있다. 위 규정을 근거로 하여 HIV 항체 양성반응이 나온 외국인에 대한 강제퇴거 및 입국금지가 이루어지고 있다.
외국국적 동포이지만, 부모와 가족이 모두 한국인이며, 가족과 함께 국내에서 거주하길 희망하는 A의 경우에도,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퇴거를 당하게 되면, HIV/AIDS가 완치되기 전까지는(현재 의학수준에서 보면 앞으로 평생 동안) 입국금지 대상자가 되어 국내에 입국할 수 없게 된다.
법무부는 인도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외국인 감염인의 체류를 허가하는 등 위 입국 제한규정을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외국인 HIV/AIDS 감염인은 체류의 목적이나 자격, 체류기간의 구분 없이 거의 대부분 입국금지, 강제퇴거 당하고 있다. 실제로 2001년부터 2007년 9월까지 외국인 HIV 감염인으로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통보된 498명 중 39명 정도만이 특별 체류사유로써 국내 체류 중이고, 나머지 대다수는 강제퇴거 등 출국 조치되었다.
"한국인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겠지만"
A에 대한 출국명령처분은 법무부의 '에이즈항체 양성반응 외국인 입국규제 내부지침'에 따라 이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법무부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3조 및 AIDS환자에 대한 인권보호를 선언한 유엔인권위원회 결의(1994/49)'에 근거하여 이 지침을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자신의 동의 없이) HIV 검사를 당하였으며, HIV 양성 반응임을 통보받자마자 출입국관리사무소 보호실에 5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소명이나 이의신청의 기회도 없이 국내 밖으로 출국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 A의 상황은 유엔인권위원회 결의를 역행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출입국 행정작용 및 절차에서 HIV/AIDS 감염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에 대하여는 더욱 잔인하고 가혹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국인 HIV/AIDS 감염인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와 편견은 A의 사건을 지원하는 과정 곳곳에서 접할 수 있었다. A의 출국기한을 유예해달라는 요청에 대하여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은 "한국인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겠지만 외국인이고, 국내에서 한국 사람과 성행위를 하다가 에이즈를 감염시키면 어떻게 하냐"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법원의 판사는, 취소소송 판결 때까지 임시적으로 출국명령처분의 효력을 정지시켜달라는 신청에 대하여, 소위 HIV 전파행위와 같은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A와 그 부모가 작성한 각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법원이 HIV 전파하지 않겠다는 각서 받아
에이즈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 아니다. 감염인이 입국하거나 체류한다는 사실만으로 공중의 감염 위험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HIV는 물이나 공기를 매개로 전파되지 않으며, 키스나 포옹, 변기를 같이 쓰거나 식사를 같이하는 것과 같은 일상생활의 접촉으로 감염되지 않는다. 전염병예방법에도 전염성이 1, 2군 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3군 전염병으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을 분류하고 있다. 나아가 HIV가 발견된 25년 전보다 다양한 의약품이 개발되어 적절한 치료법을 유지할 경우 고혈압, 당뇨와 다를 바 없는 질병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다수의 유럽 국가에서는 에이즈를 법정전염병으로 규정하지 않고 만성질환 정도로 취급하고 있으며, 오히려 HIV/ AIDS를 '사회적 질병'으로 바라보면서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금지하는 정책을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HIV/AIDS를 법정전염병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출입국법상 전염병에 관한 입국금지 대상자를 전염병의 종별로 제한하고 있다. 이때 HIV/AIDS를 출입국법의 제재를 받지 않는 5급 전염병으로 분류하여 HIV 감염은 강제퇴거사유가 될 수 없도록 했다.
2007년 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외국인 강제퇴거 등은 HIV가 외부에서 전염되는 질병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주어 외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또한 "국내 거주 감염 외국인이 검사를 기피하고 치료를 포기하게 하여 오히려 HIV/AIDS 관리에서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에 따라 "효과적인 예방정책을 위해서는 외국인이라도 감염 사실만으로 내국인 감염인에 비하여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관련 법령을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
HIV/AIDS와 인권에 관한 국제가이드라인
2004년 유엔에이즈(UNAIDS)와 국제이주기구(IOM)가 발표한 'HIV/AIDS 감염인의 국가 간 여행 규제에 관한 권고안'은 "HIV 감염 외국인에 대한 제한조치는 일반대중의 인식을 오도해서, 적절한 공중보건교육과 별도의 예방책을 마련하기 보다는, 국경 검문검색과 같은 조치를 취하면 통제할 수 있는 '딴 나라'의 문제로 여기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HIV/AIDS 인권권고안' 역시 당사국에게, "HIV/AIDS 감염인들이 적절한 상황에서 거주 자격을 얻을 수 있게끔 허용하는 재량권을 제공하여야 하며, 이는 자기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 거주 자격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 각별히 중요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오래 전부터,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에이즈(UNAIDS) 기구 및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UNHCHR) 등과 같은 유엔기구와 국제사회에서는 HIV 감염인이 입국한다는 사실만으로 공중의 감염 위험이 높아지지는 않음을 확인했다. 국제여행에 허가를 얻어야 하는 병은 오로지 황열병 뿐이고, HIV 감염 상태만을 가지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차별적이며 공중보건의 명목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한편, 유럽인권재판소는 1996년 AIDS에 의해 죽음이 임박한 당사자를 본국으로 추방하는 것은 "고문 혹은 잔인하거나 수치스러운 대우 혹은 처벌을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유럽인권협약에 위반하는 행위라고 판시한 바 있다.
감염인에 대한 치명적인 인권침해
A는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HIV 감염사실에 대한 정신적·심리적 압박과 고통을 감수할 시간도 없이, 한국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실질적으로 평생 동안 A를 자신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이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게 되는 것이다. HIV 감염인의 경우, 사회적 차별과 낙인 때문에 정서적으로 고립감을 느끼기 쉽고, 경제적 활동을 제한 받기도 한다. 감염인의 정서적‧신체적 위기가 왔을 때 가족의 지지나 사회적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출입국 제한 조치는 A에게 치명적이며 비인간적이다.
거주·이전의 자유는 오늘날에는 행복추구권, 인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격형성의 자유 등의 성격도 갖는 다면적·복합적 자유로 파악되고 있다. 즉 거주·이전의 자유(해외여행의 자유)는 인간의 행복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자신의 선택으로 다양한 자연과 사람과의 교류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점에서 인격형성에 필요한 불가결한 기본권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이는 외국인에게도 보장되는 권리임이 명백하다. HIV 감염 사실만을 기준으로 행해지는 외국인에 대한 입국금지, 강제퇴거는 공중보건이라는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는 근거 없는 공포와 편견의 반영이자, 자의적인 차별이며 인권 침해이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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