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윌슨의 전쟁 | |
그러나 사실 이것은 제스처에 불과하다. 뒤에 도사린 계산은 소련의 팽창을 어떻게든 저지하고 중동을 사수해야 하는 미국의 노림수였다. 그러니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폐허가 된 땅의 복구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게다가 20여 년 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구 소련이 했던 것처럼 그 땅을 공격했다. 어쨌든, 정치 풍자극으로서의 이 영화가 비웃는 지점은 패권주의의 추한 얼굴을 숨기기 위해 휴머니즘이 '동원'되는 풍경이다. 국가는 휴머니즘의 뒤에 숨는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국적 외교의 근간일지도 모른다.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결국 <찰리 윌슨의 전쟁> 역시 미국의 마지막 양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찰리 윌슨과 같은 날라리 하원의원에게도 살아 있는 정의로운 측은지심, 아프간의 전후 복구를 걱정하는 CIA 요원의 의리 같은 게 아니겠냐고, 아론 소킨은 은근히 말하는 듯 하다. 이런 그의 정치적 관점은 <웨스트 윙>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정리하자면, 그의 청사진 속의 미국은 패권을 갖되 그 힘을 합리적으로 구사하는 온화한 맏형의 이미지다. 그렇지 못한 미국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도 미국은 여전히, 아주 자연스럽게 패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밴티지 포인트 | |
대놓고 미국 대통령이 저격당한다는 설정을 통해 미국에 대한 적의까지도 상품화한 <밴티지 포인트>에 비하면, 그나마 <찰리 윌슨의 전쟁>은 매우 세련된 정치 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다. 남다르게 보이려고 하는 형식적인 치장에 가깝되, 내용적으로는 크게 쓸모 없어 보이는 다중 시점이라는 틀을 동원하고 있는 <밴티지 포인트>는 짐짓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 노선에 대한 반성의 시늉을 펼쳐 보인다. 대통령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다섯 차례가 넘게(다 세보진 못했지만 아주 자주 나온다)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 자체가 '우린 맞아도 싸'라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건 말그대로 자학의 시늉이다. <밴티지 포인트>는 결국 세계 평화를 이루는 것은 평범한 이들의 가슴 속에 놓여 있는 착한 심성이라는 성선설적 마무리를 선보인다. 미국 대통령을 쏘아 죽이려는 세력들도, 암살 위협에 놓인 대통령도, 그 사이에 목숨을 걸고 암살의 배후를 추격하는 경호원도 알고 보면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거기에 희망이 있는 게 아니냐는 거다. 그런데 그걸, 누가 모르나? 반 테러리즘으로 포장된 국가 패권주의의 얼굴에 살풋 미소가 번진다. 우린 다 사람이 아니냐고. 나도 이렇게 반성하고 있으니 너도 반성하라고. 우리를 그만 욕하라고. 그러니 제발이지 때리는 대로 맞고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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