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귀하고, 물가가 비싼 나라
일단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살인적인 물가였다. 게다가 우리가 도착한 뿌에르또 몬뜨(Pto. Montt)는 칠레 남부 여행의 기점이기도 하고, 도시 자체가 태평양의 만을 끼고 있어 북적이는 관광 도시 분위기가 났다.
설명은 이렇게 점잖게 해 두었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어중이떠중이 모이는 '양아치' 도시라는 말이다. 우리는 밤에 도착했고, 환전소는 모두 문을 닫았다. 할 수 없이 비싼 수수료를 물고 사설 환전소를 이용해야 했다. 게다가 살인적인 물가라니.
1인당 연간 소득이 1만 4400달러인 이 길다란 나라의 물가는 한국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큰 마트에 가보면 사람들이 동전과 할인카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의 삶은 한국에서만큼이나 팍팍한 것 같았다.
칠레는 물이 부족한 나라다. 겨우내 내린 안데스의 눈이 녹아내린 물론 일 년을 산다고 했다. 물론 옛날에 비해 많이 나아졌지만, 화장실 앞에 부스를 두고 입장료 150뻬소(우리 돈으로 약 300원)를 받는 것은 아르헨티나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기도 했다.
그 수익금으로 '화장실 지킴이' 월급 주면 남는 게 뭘까, 라는 정도의 매우 사소한 궁금증이 일기도 했으나, 이들의 독특한 문화라 생각하고 패스.
"뜯기고, 또 뜯기고…"
우리는 허름한 호스텔에 묵었다. 늦은 밤이라 배낭여행객들이 바글바글했다. 1인당 12달러. 도합 24달러. 우리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까로(비싸요)'를 외쳤다.
칠레로 넘어오는 13시간의 여정 덕에 우리의 얼굴은 충분히 푸석푸석했다. 결국 1달러 깎는 데 성공. 우린 겨우 3층의 비좁고 냄새나는 방에 갇힐 수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이 집 주인은 한국어로 '노 프라블럼'이 뭐냐고 물었다. '문제없어'라고 대꾸해주니 다음날 아침까지 써먹으며 매우 '후렌들리'하게 대해주었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한 우리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황당한 것이었는데, 24달러, 그러니까 약 12000뻬소로 우리가 묵을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쾌적한 곳이었는 지 알게 된 때는 이미 늦은 거였다.
그렇다. 뿌에르또 몬뜨라는 도시를 우리가 '양아치 도시'라 부르게 된 이유는 대충 이쯤 어디엔가 있다. 다음날 아침엔 계란 하나에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고 2000 뻬소(약 4달러)를 또 뜯겼는데, 아침 식사가 포함된 호스텔에서 1000뻬소(약 2달러) 정도로 얼마나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었는지 알았을 때 역시도 이미 늦은 거였다.
우리는 빙글빙글 웃으며 '문제없어(영어식으로 하려면 '문체훕써'로 바꿔야 하나?)'를 외치던 '후렌들리'하고 '헐트훌(heartful)'한 주인아저씨의 얼굴을 우울하게 상기하며 다음 여정인 발디비아(Valdivia) 행을 준비해야 했다. 서양 속담이 하나 생각난다. 친절이 원수가 된다.
검은 눈동자와 피부의 칠레 사람들
백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아르헨티나와 달리 칠레인들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피부는 대개 검다.
발디비아에서 만난 칠레인 노부부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안 뒤, "당신을 보니 칠레인들의 디엔에이(DNA)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것 같아요"라고 얘기해 주었다.
칠레인들은 대개 이 지역 원주민인 마뿌체(Mapuche)족의 혈통이 섞여 있다. 백인들은 끄리오요(Criollo)들이거나, 거의 19세기 말, 혹은 20세기의 세계 대전을 피해 이주해온 독일인, 이탈리아인들의 후손이다.
특히 발디비아는 독일계 이주민의 후손들이 많이 사는, 약간 '유럽풍'의 도시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칠레'식 도시 풍경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본 바에 의하면 원주민이라 짐작되는 사람들은 대개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있고, 백인들은 대개 멋쟁이들이었다.
낮이 끝나면 감상으로, 여행이 끝나면 봄으로
여름에서 봄으로. 발디비아에서 만난 독일인 여행객과 나눈 대화 중에 우리의 여정을 짧은 말로 표현해 보려고 생각해 낸 말이다.
세상 끝에서 온 우리의 상황과 심정을 표현하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시 같은 분위기도 나긴 한다. 그렇다. 이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한국의 '봄'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행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낮에 힘겨운 일정을 끝내고 나서 밤에 감상적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페인어를 못하는 관계로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며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을 잡아내는, 매우 소모적인 작업들에 시달리다보면, 뇌는 위나 대장, 혹은 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빨아내 버리고 만다.
이 역시 우리가 만들어낸 이론이며, 전혀 근거라고는 찾아 볼 수 없지만 자기 합리화에는 많은 도움이 된다. 이런 감상적인 말들을 만들어내며 이틀 밤을 보낸 발디비아(Valdivia)는 지금까지 여행 중에 최고의 기억을 선사한다.
독일 기민당 지지자 "당신들, 사회주의자예요?"
발디비아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었다. 늦은 저녁에 터미널을 빠져나온 우리는 숙소를 잡고 짐을 푼 후, 숙소에서 만난 독일인 친구, 마리(Marie)와 함께 발디비아의 '맥주 박물관'에 들러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을 '기독교민주당 지지자'라고 소개한 그녀는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짧은 견해를 말해주기도 했다.
한국의 이른바 '자유주의 정당'이라 하는 민주신당의 정치적 성향이 독일에서 보수라 여겨지는 기민당의 정책보다 훨씬 오른쪽에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녀는 우리가 체 게바라를 좇는 여정을 계획한 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사회상에 관한 이야기들에 관해 물었다.
우리의 대답은 단순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우리에게 사회주의자냐고 물었다. 우리의 대답은? 글쎄.
우리는 또 '삼성 공화국'과 '아파트 공화국'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고, 경영학을 공부한다는 그녀는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들으며 웃어 제쳤다.
에르네스또의 여행이 담긴 신문 기사를 보기 위해
발디비아에서 우리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꼬레오 데 발디비아(Correo de Valdivia)라는 신문에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의 여행에 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51년도 신문이었겠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신문사의 자료 보존 집착 습성을 믿고 꼬레오 데 발디비아라는 신문사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그런 이름의 신문은 역시 없었다. 엘 디아리오 아우스트랄(El Diario Austral)이라는 신문이 이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신문인 듯 싶어 그 곳을 찾았다.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앉아있는 직원이 한 기자를 소개해주었다.(이 신문사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물은 없었다.)
우리는 여행의 취지와, 우리가 한국에서 얼마나 유명한 저널리스트인지 매우 과장해서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이 기자는 우리의 신분 따위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의사소통을 위한 간단한 영어 단어들을 조합하며 땀을 뻘뻘 흘리기에 바빠보였다. 우리는 잠시동안 이 기자의 노력을 감상해야 했다.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엘 디아리오 아우스트랄 홈페이지의 검색 방식을 설명해 주는데,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회사 인트라넷의 접속 권한을 우리에게 주려는 것인 줄로 착각할 뻔 했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우리도 컴퓨터가 있는데, 이 곳에 접속하면 검색 엔진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라고 지친 듯 물었더니 '물론이죠.'라는 밝은 대답이 돌아온다.
후에 손문상 화백이 한 한마디. '원래 신문사라는 곳은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곳이야.' 이 바람직하지 않은 가설이 썩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별 소득 없이 신문사를 나와야 했다.
"아르헨티나의 나병학도"로 소개된 에르네스또
그의 설명을 정리하면 이렇다. 이 신문사의 역사가 오래된 것은 사실이고, 1982년에 새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이름을 '엘 꼬레오 발디비아'에서 '엘 디아리오 아우스트랄'로 바뀌었다.
'엘 꼬레오 발디비아'라는 신문의 1951년도 판에 '젊은 나병학도와 생화학자'의 여행기사가 실렸던 것도 맞다고 했다. 당시 신문 기사는 에르네스또를 아르헨티나의 나병학 권위자라는 멋진 타이틀로 소개했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신문사에는 자료 보관소라는 이름 따위가 존재하지 않으며(3층짜리 작은 건물에 많은 것을 바라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신문 자료를 찾으려면 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을 찾아보라고 했다. 물론 그 곳에 자료가 있다는 것은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네루다의 도시, 떼무꼬를 향해
우리는 떠나오기 전에 칠레의 악명 높은 도서관 시스템에 관해 읽은 적이 있었다. 결국 도서관은 포기하기로 한다.
에르네스또는 발디비아를 거쳐 떼무꼬(Temuco)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떼무꼬 시의 신문이었던 '엘 아우스트랄(El Austral)'지에도 에르네스또의 기사가 난 바 있다. 이 기자는 떼무꼬의 '엘 디아리오 아우스트랄'지가 과거 '엘 아우스트랄'지였다고 설명해 주었고, 발디비아의 이 신문사와 같은 계열 회사라고 덧붙여주었다.
우리는 기차의 도시, 철도 노동자의 아들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의 도시(하긴, 칠레는 어디를 가나 네루다 천지다.), 칠레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목재 산업의 도시, 그리고 도떼기 시장으로 유명한 떼무꼬 시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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