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영어로!
하지만 그들은 '잉글리쉬 리퍼블릭(영어 공화국)'을 만드는 데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 사람 모두를 잉글리쉬 네이티브 스피커(영어 원어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학교 교육, 학원? 다 필요 없다. 방송을 모두 영어로 바꿔라! 효과는 단기간에 나타날 것이다. 잘만 하면 이명박 당선인의 임기 5년 안에 전국 곳곳에서 유창한 영어 발음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당선인이 '원대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방송부터 장악해야 한다. 싹 장악한 후 '영어방송 할당제' 같은 걸 도입해 '방송시간의 80% 이상을 영어로 할 것', '한국어로 하는 광고는 일반 광고료보다 2배를 더 지불할 것', '드라마에는 반드시 영어 원어민이 5명 이상 등장해 영어로 대화할 것' 등의 방송법시행령을 강제해야만, 그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잠깐, 그래서 방송을 통제하려 그렇게 애쓰는 건가?
인수위는 이렇게 '이훽티브(효과적인)' 방법을 왜 사용하지 않나. 이경숙 위원장이 백날 '오렌지'가 아니라 '오뤤지', '프렌들리'가 아니라 '후렌들리'라고 강조한들, TV에서 강호동이 '오뤤지', '후렌들리' 한번 말하는 효과를 따라잡을 성 싶은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너무 과신하는 게 아닌가라고 감히 어드바이스(충고) 하고 싶다.
말이 나온 김에 '영어 몰입 방송'을 상상해보자. 아나운서들은 이제부터 '오뤤지' 발음 여부를 보고 뽑는다. 어깨를 으쓱이며 미국식 발음으로 '어허' 같은 추임새를 잘 넣으면 '생활영어'의 모범으로 9시 뉴스 진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미리 준비하자. 스포츠 캐스터, 해설자들은 비인기 직종이 될 게 틀림없으니 다른 일을 알아보길 권한다. 국제 대회나 해외 경기는 미국의 ESPN이나 영국의 스카이 스포츠로부터 원음 방송 그대로 수입할 테니까.
설 특집 영화로 한국 영화 보기는 하늘의 별따기겠지. 굳이 성우를 고용해 영어 더빙을 하느니 편하게 영어권 영화만 틀면 되든데, 뭐. 연예계는 말 그대로 지각 변동에 휩싸일 수밖에 없겠군. 유재석과 강호동은 퇴출될 게 뻔하고, 영어 교재 출판에 영어 강사 경력도 있는 김영철의 전성시대가 올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다니엘 헤니, 한예슬 등의 '미국파'만 주인공을 꿰찰 수 있겠네. 날카로운 우리말 유희를 즐기던 김수현 작가는 대박 작가에서 쪽박 작가로 한 순간에 인생의 나락을 경험할 테고. 연예인 영어 배우기 열풍 때문에 영어 학원 옆자리에서 장동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쁠 수가!
영어몰입 사회 악몽
장난은 그만두자. 솔직히, 이건 정말 장난삼아 말할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벌써 '영어몰입 방송'을 시도한 프로그램도 나왔다.
SBS 라디오 <이숙영의 파워FM>은 1월 31일 두 시간 동안 '영어몰입 방송'을 시도했다. 덕분에 청취자들의 비판에 시달렸고 핸드폰 문자 참여는 5분의 1로 줄어들었다. 비록, 좋지 않은 반응 때문에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웃음거리로 끝났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영어몰입 사회 악몽'을 미리 보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했다.
이날 방송은 진행자, 청취자와 초대손님 사이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말 그대로 '어수선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이 얘기하고 저기에서 저 얘기하는 '마이동풍' 잔치에,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은, 영어가 잠식할 우리 사회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겨우 두 시간짜리 라디오 방송이 이 정도다. 대본을 읽으며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조차 영어를 일상에서 쓰지 않는 DJ, 청취자가 두 시간도 못 버티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학교 수업 전체를 영어로 바꾸면 아이들이 영어 학원에 갈 일이 없다고? '영어 좀 한다는' 어른들이 두 시간도 못 버티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루를 버틸 수 있겠는가. 이왕 못 알아듣는 거 아예 포기하거나 차라리 외국으로 보내 달라 조를지도 모른다. 영어몰입 교육을 하면 기러기 아빠가 줄어들 거라고? 정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왜곡된 우리말 사용으로 인한 심각한 의사소통 문제가 발견되고 있다. '엄마, 나 이번 시험 대박크리났어(아주 잘 봤어)!', '걔는 성격이 좀 쩔어(안 좋아)'라는 아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모 이야기를 마냥 우스개로 넘기기 힘들다. 제대로 우리말을 가르치지 않으니 언제 어디서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하는지 '눈치'마저 없어지고 있다. 입사지원서에 이모티콘을 넣고 '해주삼~'이라는 표현을 쓴 이야기가 과연 한 철없는 대학생의 행동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할 학교의 우리말 교육이 영어에 잠식되는 순간, 이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예상이 안 되나?
제대로 된 우리말 교육부터
솔직히, 영어를 잘 해서 나쁠 건 없다. TOEIC 평균 점수는 끝없이 높아지는데 영어로 대화 한 마디 못하는 한국 사회의 '이상한' 영어교육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하는 것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국어'라는 '한 나라의 국민이 쓰는 말', '우리나라의 언어'를 영어로 바꿀 생각이 아닌 이상에야, '영어교육 정상화' 보다는 '우리말 교육 정상화'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 답안지를 채점하다 '이건 참 해피해요'라거나 '그건 정말 우왕 굳이에요. ㅋㅋ' 같은 답을 보았을 때의 참담함은 어떻게 바로잡으려 하는가. '굽실굽실'이 아닌 '굽신굽신'을 표준어인양 써대는 TV 프로그램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 우리말을 국어로 대접하고 싶다면, 사회의 올바른 언어습관으로 10대와 50대 사이의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없애고 싶다면, 아이들에게 바른 언어와 함께 바른 사고를 가르치고 싶다면, '올바른' 우리말 교육부터 고민해보자. 뭐, 그런 거 따위에 관심 없다거나 이것도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말한다면야 참 디'휘'컬트(곤란)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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