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가 식는다는 것은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항상 사랑에 취해 있었다면 철도나 다리, 비행기, 팩스, 백신, TV 따위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최초의 도구 발명에서 시작한 문명의 특징, 즉 기술의 지속적 발전 대신 과일맛 사탕이나 꽃다발, 피임도구만이 즐비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진지하게 따져보자. 만일 낭만적 사랑에 의한 화학적 변화가 정신병이나 약물로 인한 쾌감과 유사하다면, 장기간 사랑에 빠질 경우 정신적 손상이 생길 수도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6년 2월호 중에서 |
여기 매력적인 두 남녀가 있다. 그들은 6년째 연애중이다. 둘은 바로 옆집에서 살며 사실상 동거중이다. 남자의 눈엔 처음엔 뭘 해도 예뻐 보이던 그녀가 이젠 그저 "여동생 같고 조카 같아" 보인다. 직장에서 만난 파릇파릇한 알바생이 꼬리를 치니 슬쩍 가슴이 설렌다. 여자도 남친의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은 게 속상하지만,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립다. 게다가 일 때문에 만난 준수하고도 매너 좋은 남성이 들이대주니, 지금 남친이 마치 헌 옷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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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연애중 |
학설에 따르면, 열정적인 로맨스의 유효 기간은 길어야 4년이라고 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열정적인 감정을 생성시키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분비 기간이 채 2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로맨스가 이보다 더 연장될 수 있다면, 둘 사이에 아기가 생겨 영아기를 거치는 시간이 추가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로맨스란 뇌분비 물질의 작용과 출산과 육아라는 실용적인 이유가 결부된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막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이라면 괴상망측할뿐더러 잔인하게 들릴 분석임에 틀림 없지만 앞서 인용한 잡지 글처럼 사랑의 열병은 일종의 일시적 정신병과 같기 때문에 오히려 일찍 끝나는 게 자연스러울 뿐더러 다행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로맨스의 흔적, 즉 대상이 된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이냐일 터이다. 계속 만나자니 지겹고 헤어지자니 나쁜 사람 될 것 같다. 사실 이게 제일 골치 아픈 문제다. 위의 커플도 그런 상황이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흥분 상태를 애시당초 졸업하고, 이제 '연애'라고 일컬어지는 '생활'에 돌입해 있는 상태다. 물론 둘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연애 초창기의 설렘과 떨림은 온데 간데 없다. 어쩌면 상대방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느껴지는 익숙한 체취'를 더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결혼이라는 법적 관계에 묶여 있지 않은 이상, 둘은 서로 다른 짝짓기를 시도할 위험에 빠져 있다. 이럴 경우 처방은 의외로 간단하다. 빨리 결혼하든가, 아니면 빨리 헤어지든가. 이도 저도 아니면 서로를 기만하며 연애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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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연애중 |
<6년째 연애중>은 인스턴트 사랑이 차라리 멋스럽게 여겨지는 최근 세태를 거스르고 꿋꿋하게 너무 오래 연애만 한 커플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들이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기 시작한 남녀의 이야기이거나, 어쩔 수 없이 이별하는 커플의 눈물콧물 쥐어짜기 스토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6년째 연애를 '지속'하고 있는 커플을 다룬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일단 그 자체로 진부함에서 벗어난다. 도파민 분비 기간에만 초점을 맞춘 그 흔한 '사랑이여 영원하라' 류의 영화가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등장 인물들이 하나 같이 본업은 제쳐두고 짝짓기에만 몰두하는 TV 멜로 드라마들과 달리, 남녀 주인공 각자의 생활과 생업에도 꽤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영화는, 사랑이 일상과 결부됐을 때의 억지스럽지 않은 풍경을 포착한다. <연애의 목적>이 남녀간의 사랑을 사회적 권력 관계의 틀로 바라보는 파격을 선보였다면, 이 영화 <6년째 연애중>은 사랑이 식은 커플의 현실적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연애 생활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확보한다. 한때 사랑의 포로였지만, 이제 그들에겐 자유 의지로 그 사랑을 새로운 단계로 업버전시킬지 아니면 폐기처분하고 아예 프로그램을 다시 깔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 시점을 현명하게 넘기지 못하고 좌초하고 만다. 한때 '너 없인 못살아' 하던 사랑이 '너 때문에 못살아'의 원수로 돌변하는 사례, 비일비재하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거의 사실혼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어쩌면 결혼이라는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수 많은 커플들이 '지속 가능한 사랑'의 방법론을 모색해보는 영화적 사례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6년째 연애중>은 (이야기 전개 속도의 다소 싱거운 느슨함에도 불구하고) 제법 참신하고, 나름대로 귀 기울일만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둘은 영원토록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해피 엔딩에 늘 '뻥이요~"라고 소리치고 싶었기에, 더욱 그렇다. 2월 5일 개봉. 덧붙임) 또 다른 학설에 따르면, 도파민 분비 기간이 끝난 오랜 연인들에겐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커플의 사랑을 차분한 애착 관계로 이끌고 유대감을 강화한다고 한다.
지난 2004년 <발레 교습소>로 스크린 신고를 했던 윤계상은 이 영화를 통해 배우로의 전업을 본격 선언하고 있다. 쭉 배우 해도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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