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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미디어의 공포를 실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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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미디어의 공포를 실험하다?

[뷰포인트] <클로버필드>, 캠코더 미학의 논란을 부추기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손에 들린 카메라를 통해 철저한 1인칭 시점으로 구성된 영화를 만든다는 발상은 <클로버필드>가 처음 시도한 건 아니다. 국내에 <챨리 모픽>이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된 바 있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철저한 1인칭 시점으로 베트남에서 전투를 수행하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 영화의 엔딩은 아마도 카메라를 든 찰리 모픽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고 짐작할 수 있는 장면(카메라에 담긴 화면이 흔들리면서 밑을 향하더니 90도 회전한다.), 그리고 이어 비디오 화면이 꺼지는 장면으로 맺는다. 하지만 <클로버필드>가 시도한 것은 좀 더 야심차다. <챨리 모픽>과 달리 <클로버필드>에서 카메라를 쥔 사람은 전문적인 다큐멘터리 작가는커녕 아마추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카메라 자체를 잡아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며, 그가 사용하는 카메라 역시 35mm나 16mm의 필름 카메라가 아닌 가정용 캠코더이다. 당연히 화질은 훨씬 조악하고, 훨씬 심하게 흔들리며, 앵글도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피사체를 제대로 비추지 못하거나 인물이 잘리는 장면들이 많다.
클로버필드
물론 이것은 모두 의도적인 설정이다. 저 불안정한 앵글과 구도의 화면들 역시 매우 공들여 계산된 화면들이며, 몇몇 장면들은 그 인물의 그 카메라 앵글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화면들이 들어있다. 무엇보다도, 카메라에 잡힌 여자들이 모두 하나같이 근사한 외모를 가진 20대들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화면이 주는 공포감은 강력하다. 여타의 다른 영화들에 당연히 있는 장면, 즉 신(감독)의 입장에서 전체 상황과 인물들?있는 위치를 조감해 주는 마스터 숏이 전혀 없는 까닭에, 관객은 영화 속 등장인물이 알고 있는 것만 알고, 그가 가진 정보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거대한 파괴의 힘에 쫓겨 무작정 도망쳐야 하는 상황의 그 공포감은, 과연 대단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일깨우고 있는 것은 단순히 영화 내내 흔들리는 카메라가 유발하는 현기증과 멀미, 혹은 주인공들이 느끼는 공포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현장감만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제까지 봐왔던 영화들이 어떤 영화문법에 의거해 왔는가를, 오히려 그 문법을 다 깨놓고 있는 이 영화를 통해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영화 내내 느끼게 되는 답답함은, 영화 내적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데에서 기인하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일명 '마스터 숏'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제껏 보았던 영화들의 '시점'이 대체로 전지적인 신의 위치에 있는 감독의 시선이라는 것, 이 영화엔 존재하지 않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가 봐온 영화들을 구성하는 시점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만큼 강하게 웅변해주고 있는 영화는 없다. 게다가 이 영화의 공포만큼 안전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이 영화가 기준을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잡은 채, 과거 누군가에 의해 기록된 기록물이라는 설정을 자막을 통해 공지받는다. 영화 내내 우리는 주인공들의 공포에 함께 하며 그들의 공포를 마치 내 것처럼 느끼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 우리는 그 공포가 지금 바로 현재 일어나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 철저하게 타인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어느 사건, 나아가 그마저도 실은 '재미의 스펙터클'을 위해 조작된 허구라는 사실을 동시에 되새긴다. 관객은 과거 그 어느 영화를 볼 때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영화로부터 소외된다.
클로버필드
분명 캠코더가 일반 가정에도 보급되고 휴대폰 카메라 등으로 누구나 동영상을 만들며 이른바 'UCC의 시대'가 열린 현재, 우리는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는 시대"를 맞은 것처럼 보이고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영화 속에 적극 반영하며 이제까지의 영화들에 강하게 도전을 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과거 그 어떤 영화보다 관객을 '공포의 현장감'에 끌어들이면서도 그 현장에서 소외시킨다. 게다가 이 영화에 의하면,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감독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뜻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철저한 1인칭 시점'을 고수함으로써 오히려 영화감독의 자리(심지어 촬영감독 혹은 카메라맨의 존재조차)를 철저하게 지우거나 숨겨놓는다. (이 영화의 감독인 맷 리브스보다 제작자인 J.J. 에이브럼즈의 이름이 훨씬 더 많이 언급되는 것은 단순히 유명세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수많은 셀프 카메라와 UCC들이야말로 바로 카메라 앞에서건 뒤에서건 누군가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목적이 큰데, 이 영화의 1인칭 카메라 시점은 역으로 카메라 뒤의 존재감을 지워야만 성립이 된다. 이것이 과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화 문법일까?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실험해 보고 싶은 창작자에게 이런 시도는 한번쯤 해볼 만한 시도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영화가 초래하는 그 엄청난 불쾌감과 공포와 충격을 보자면 충분히 이 영화가 자신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 같지만, 과연 이 영화의 방식이 새로운 영화의 미래라거나 방식의 혁신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가지는 폭력적 속성을 고찰해온 영화이론가들(예컨대 국내에서 출간된 [매체로서의 영화]에 실린 논문 중 세르지오 코르부치 감독의 <용병대>를 예로 들며 영화의 폭력성을 고찰했던 볼페 레페니스와 같은)에게,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며 부르주아적인 폭력의 속성을 관객의 신체에 직접 전달되는 물질적 폭력으로 바꾸어 놓는, 매우 기분나쁜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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