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합의를 뒤집어 보자. 두 사람이 "공정 공천 원칙에 합의했다"는 발표내용엔 어떤 역설이 숨어있을까? '공정 공천'이 애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역설이다.
엄밀히 보면 '공정 공천 원칙'은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이 합의할 사안이 아니다. 이미 정치적으로 불문율이 된 원칙이다. 새롭게 합의하고 말 게 아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합의하는 게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 주체는 공천심사위가 되어야지 이명박-박근혜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될 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어제의 합의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공정 공천 원칙'에 기대어 입씨름을 벌여왔다. 이명박 당선자는 공천 갈등이 표면화될 때마다 "공천은 당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해왔다. 박근혜 전 대표 쪽이 이방호 사무총장의 공천심사위 합류에 반대하면서 내건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특정인, 즉 이명박 당선자의 의중이 공천 심사에 반영되면 불공정 공천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랬던 두 사람이 어제 만나 '공정 공천 원칙'에 합의했다. 참으로 어색하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원칙'은 모두가 향유하는 가치다. 당사자든 관찰자든 누구나 읊조릴 수 있는 게 '원칙'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한나라당에, 공천심사위에 '공정 공천'을 당부한 것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문제될 게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언론 보도에 의해 드러난 실상의 흔적은 그렇지가 않다.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 당선자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20분간 진행된 비공개 독대에서 "경선에서 나를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공천에서 배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흔적이 하나 더 있다. 박근혜 전 대표 쪽이 이명박 당선자 쪽 인사에게 공천희망자 85~90명의 명단을 전달했다고 한다.
'원칙'에 빗대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천심사위가 아니라 이명박 당선자 쪽에 공천희망자 명단을 제출하는 행위는 '원칙 일탈'에 해당한다.
이명박 당선자도 마찬가지다.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난 후에 이방호 사무총장을 불러 지시했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표 쪽이 공천과 관련해 요구하는 내용 중 수용할 수 있는 건 적극적으로 수용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역시 '원칙 위배'에 해당한다. 공천심사위원장도 할 수 없는 말을 이명박 당선자가 했다. "공천은 당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던 이명박 당선자가 당에 지시를 내렸다. '공천 간섭'이다.
말을 하다 보니 생뚱맞은 것 같다. 원칙은 맞는데 현실을 잘 모르는, 순진한 말만 늘어놓은 것 같다.
내친 김에 마저 확인하자. 현실은 어땠을까?
박근혜 전 대표가 이명박 당선자에게 '공정 공천'을 요청하고, 박근혜 전 대표 쪽이 이명박 당선자 쪽에 공천희망자 명단을 제출했다는 얘기엔 힘의 우열 '관계'가 새겨져 있다. 이명박 당선자가 이방호 사무총장에게 박근혜 전 대표 쪽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지시했다는 얘기엔 힘의 우열 '정도'가 녹아있다.
어느 한 쪽이 공존의 틀을 깨고 독자생존을 모색할 만큼 힘을 완전히 독점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공존관계가 동등한 지분구조 위에서 팽팽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어차피 결론은 같다. '공정'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았다. 공천 갈등이 공정 경쟁, 공정 다툼의 장에서 진행된 게 아니고, 공천 결과가 공정 배분으로 귀결될 것도 아니다.
공천 갈등은 이미 '끝'이 예정된 것이었고, 공천 결과는 '배려'로 귀결되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배려'의 크기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