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을 통해 헌정 사상 두 번째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는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국민들의 손에 의해 '민주 대 반 민주'의 구도가 소멸된 현실은 '진보개혁세력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또 당장 4개월 뒤 총선이 예정돼 있는 정치 일정 때문에 이번 대선 패배는 진보개혁세력의 절체절명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2008년 총선마저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게 된다면 중앙정부, 지방정부, 의회를 한나라당이 '싹쓸이'하는, 국민의 합의에 의해 구성된 '일당 독재 국가'가 탄생되는 셈이다. 진보개혁세력에게 재기의 기회는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까지 기다려야 주어진다.
그래서 이번 대선을 통해 표출된 '민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보개혁세력을 떠나 한국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고민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은 이같은 문제의식으로 대선이 끝난 다음날인 20일 좌담을 마련했다. 이날 좌담에는 김호기 연세대 교수, 손혁재 성공회대 교수, 안병진 경희대 교수가 참석했다.
이날 좌담에서 참석자들은 이번 대선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지지세력의 요구를 대변하는 데도 실패한 노무현 정권에 대한 '두 번째 심판'이라는데 이견이 없었다. '첫 번째 심판'이었던 지난 지방선거 이후에도 뼈를 깎아내는 쇄신과 반성이 뒤따르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범진보개혁세력은 새로운 가치, 조직, 리더십을 만들어 내는데 실패했다.
진화를 거듭해 '보수의 노무현'이라 할 수 있는 이명박을 대표주자로 내보낸 한나라당보다도 범여권 세력은 몸과 마음이 무겁고, 국민들이 보내는 신호에 둔감했다. 두 번의 민주정부의 정책 실패로 심화된 사회적 양극화가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중도적 유권자들의 보수화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국민이 노망났다"고 탓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현재로선 개혁진보세력이 4월 총선에서도 패배할 가능성이 적지 않지만, 기회가 아주 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이들은 지적했다. 이제라도 발본적인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을 시도한다면, 이번 총선에서 패배하더라도 훗날을 도모할 '종잣돈'은 마련할 수 있지 않겠냐는 관측이다. 196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골드워터가 패배했지만 1980년대 '보수의 르네상스'가 도래할 수 있게 만든 기반을 마련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음은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좌담을 정리한 것이다.
국민 손으로 '민주 대 반민주' 구도 소멸시킨 2007 대선
프레시안 : 87년 직선제가 부활한 이후 승자와 패자, 저조한 투표율 등 결과가 미리 예상된 것은 이번 대선이 처음인 것 같다. 우선 대선 결과에 대해 평가하자면?
손혁재 : 대선결과를 보고 작년 지방선거 때 우려했던 '반동의 세월'이 현실화됐다는 걸 느꼈다.
유권자들의 투표 성향을 보면 두 가지 경향을 띤다. 대선은 단임제니까 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보다는 미래전망적인 투표를 하게 되고, 그 사이의 총선, 지방선거 등은 현 정부에 대한 심판과 평가가 되는 회고적 투표 성향을 띠게 된다.
이번 선거는 두 개가 뒤섞인 것 같다. 후보들이 미래비전을 어떻게 제시하는가를 보고 투표한 것이라기보다는 노무현 대통령, 참여정부, 열린우리당에 대한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IMF 직후 치러진 1997년 대선과 비슷하다. 당시 IMF를 누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도 판단의 근거였지만, 이를 오게 만든 정당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컸다. 97년 선거와 비슷하게 이번 선거도 회고적인 투표 성향과 미래전망적인 투표 성향이 혼재했고, 회고적인 투표성향이 강했다.
안병진 : 어떤 면에서 보면 정치현상을 분석하는 정치학자들보다 유권자들이 더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학자들은 전망적 투표를 해야한다고 당위론적으로 얘기를 한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알고 있다.
이전에 즐겨 읽었던 책이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그 중 특히 '사상이라는 건 흔히 자기 생각을 사상이라고 착각하는데 자기의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큼이 정확히 자기 사상이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걸 지식인들이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신영복 선생의 얘기를 몸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개혁파 후보가 '정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했는데 개혁세력의 지난 십년간 실천의 양태가 이를 내재화하고 실천으로 보여줬는가. 아니면 문국현 후보가 정치과정에서 이를 보여줬나. 그런 의미에서 유권자들이 회고적 투표를 했다는 점은 그만큼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호기 : 일단 가치중립적 차원에서 이번 선거의 의미를 지적하자면 사뮤엘 헌팅턴이 정권교체는 민주주의 공고화의 한 증거라고 지적했다. 97년에 이어 두 번째 수평적 정권교체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도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두 번째는 민주화시대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국민들에 의해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소멸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가 끝나고 든 생각은 과연 우리에게 기회가 없었느냐는 것이었다. 아니었다. 지난 지방선거는 대단한 경고를 한 셈이다. 전북을 제외하고 전 지역을 한나라당이 석권했다. 지방선거 이후 무려 1년 반의 시간이 있었는데 주체적 역량을 극대화하지 못했다.
지방선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대선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 지지율과 지금 받았던 지지율이 거의 똑같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왔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왔던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의 지지율에 민주노동당 후보들의 지지율을 더하면 통상 진보개혁진영의 고정 점유율이라고 할 수 있는 35% 수준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정동영 후보, 문국현 후보, 권영길 후보의 지지율을 더하면 그 정도다. 즉, 고정지지층은 떨어져나가지 않았는데 2002년 대선에서 진보개혁세력을 지지한 중도계층이 한나라당 쪽으로 간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이미 '경고'가 켜졌는데도 중도개혁세력이나 정통진보세력이나 한 것이 없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 예정된 비극이었나
프레시안 : 이번 대선의 의미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지난 5년 과연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얘기해야 될 것 같다.
안병진 : 정치적 차원에서는 당시 제기된 정치개혁의 과제를 어느 정도 실현했다는 점에서 성공의 역설이 있다.
제가 더 주요하게 보는 것은 출발에서부터 이미 비극이 예정돼 있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정치의 개혁과 경제의 현상유지라는 이원적 트랙 구도를 잡았다.
하지만 경제적 현상유지라는 목표에 있어 노 대통령을 포함한 개혁파 자유진영이 알지 못했던 것이 두 가지다. 노 대통령이나 개혁파 자유주의 세력이 어떤 자유주의를 추구할 것이냐에 있어 사상적 수준에서 대단히 천민적이었다. 재벌 문제에 있어 매우 불철저한 태도가 자유주의 세력이라고 착각했다. 재벌은 봉건적 왕정의 문제다. 자유주의가 가장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또 하나는 자유주의를 곧 신자유주의로 등치시켰다, 마치 신자유주의가 유일한 대안으로 착각했던 것 속에서 계속 실정이 발생했다. 자신들이 얼마나 쉽게 미국적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거대한 착각 속에 빠졌다. 그런 면에서 지난 1년 반 동안 기회를 살릴 수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 살릴 가능성도 크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안 돼 있었다. 선거에서 확인된 민의를 올바로 해석하고 실현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건 거창한 애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민의를 반영한 세력이 어디였나. 한나라당이었다. 여기에 통렬한 슬픔이 있다.
김호기 : 노무현 정부 5년은 DJ 정부와 연관관계에서 살펴봐야 한다. 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 DJ 정부가 내린 처방은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복지국가의 결합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갔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유럽식의 조정적 시장경제로 경제정책 기조를 바꿨어야 했다. 노무현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도 있는데, 나름대로 노력한 부분이 있다. 다만 경제영역에서 유럽식 경제를 모델로 역사적 대타협을 모색했어야 하는데 이를 못하고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기이한 패러다임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물론 이말은 노 대통령이 여담으로 한 말이지만, 나는 이말만큼 노무현 정부의 모순을 잘 보여준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의도는 신자유주의와 좌파의 민중성을 결합시키겠다는 의도였으나, 나타난 결과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세계화 시대에 전통 좌파들이 갖는 한계라는 두 영역의 부정적 측면만 불거졌다.
지난 11월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에서 'IMF 10년'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는데, 국민들의 48%가 '소득이 절대적으로 감소했다'고 답했다. 실제 소득이 감소되지 않았는데도 문제는 국민들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정치적 행동은 이성적 판단보다 정서적 느낌이 중요한 측면이 있다. 이런 국민들에게 성장률, 주가상승, 수출 증가 등 경제지표를 보라고 노무현 정부가 얘기했을 때 국민들이 느낀 배신감과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최선을 다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이해를 구하고 국민들을 어루만졌다면 이 정도로 돌아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현 시점에서 대단히 안타깝다.
손혁재 : 참여정부가 절대 인용하지 않는 경제지표가 가계소득 증가율이다. 이는 확실히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가계소득 증가율은 과거보다 줄어든 상황이므로 상대적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킨 지지기반의 상당수가 등을 돌린 것은 실제로는 노무현 정부 스스로가 밀어낸 측면도 크다. 자신의 지지계층의 이해와 요구에 적극 부응하지 못했다. 그 중 하나가 노무현 정부와 노동계층의 관계인데, 초기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 중 하나가 지나치게 친노동자적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참여정부는 반노동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또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매몰되면서 천민자본주의가 더 확산됐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곤층이 확대됐다.
반면 보수의 능동화는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지난 5년간 보수적 기독교, 내지는 극우적 반북세력 등이 굉장히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과거에는 사회 자체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아도 됐지만, 민주개혁세력의 집권으로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미국에 대해서도 비판적 목소리가 나오니까 보수 세력이 적극적으로 결집하는 과정이 일어났다. 이에 힘을 실어준 것이 보수 언론이다. 여기에 이전에는 인터넷 공간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개혁적이고 현상타파적인 게 주류였지만, 지금은 보수반동적인 분위기가 인터넷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이처럼 참여정부에 대해 비우호적인 세력은 늘고 결집한 반면 참여정부를 지지한 세력은 떨어져 나갔다.
'몸'과 '마음' 모두 무거웠던 개혁세력
프레시안 : 정치적 측면에서 안병진 교수가 지적한 대의정치의 실종 문제도 참여정부의 문제 중 하나로 많이 제기된 것이다. 소위 독불장군식 형태가 지지율을 떨어지게 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보는가?
안병진 :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과 같이 자의적 행태는 정치학계에서 많이 비판돼 왔다. 이런 문제의 극복 방안으로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이 정당정치의 강화를 얘기하는데, 나는 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지나치게 교과서적이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민심을 가장 잘 반영한 반면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은 어땠냐. 당심이 권영길을 후보로 만들었는데 그게 과연 진보세력의 표심이었나.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유럽식의 진보적 정당이 구축되고 그 정당의 아젠다를 갖고 통치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오히려 사회적 기반에 뿌리내린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이게 심각한 화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김호기 교수가 신자유주의와 좌파이론의 기묘한 결합을 문제로 지적했는데, 노 대통령은 근대주의자다. 20세기적 인물이다. 20세기적 진보는 여러 측면에서 한계를 갖는데, 자신의 정책이 어떻게 의도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뉴딜시대의 특성이다. 자신의 진보적 정책이 의도한 대로 실현될 것이라는 20세기적 발상으로는 21세기에 걸맞는 국정운영 방식, 의회와 관계 등에 대해 고민할 수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거의 고민하지 못한 채 정권을 잡았고 그나마 고민했다는 게 전 세계적 전무후무한 당정분리라는 기형적 결과를 낳았다. 개혁력들은 어떻게 하면 20세기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나, 어떤 설계도로 다시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손혁재 : '반동의 세월'을 얘기했는데, 외부의 힘에 의해 반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무력함 때문에 반동이 왔다.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20대들의 보수화가 많이 얘기됐는데, 이미 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이 사회가 민주화됐다. 이는 민주주의를 위해 윗 세대들이 얼마나 투쟁했는지 관심이 없고 이해도 못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민주개혁진영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이상 과거만 내세워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호기 : 그람시가 과거의 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게 위기라고 했다. 진보개혁세력이 현재의 가치, 리더십을 가지고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없는 것 같다. 이게 위기다.
돌이켜보면 몸과 마음이 다 무거웠던 거 같다. 몸은 조직이고, 마음은 가치나 정책을 말한다. 중도개혁세력은 열린우리당을 만들고 올해 3년만에 해체시켰다. 그리고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었는데 열린우리당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국민들은 느끼지 못한다. 도로 열린우리당이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은 민주개혁세력도 기득권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근본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누군가 양주 마시는 386을 얘기했고, 진보개혁세력은 못본 척 했지만 이런 문제에 대면해야 한다. 적어도 국민들의 시선에서는 과거에 우리가 가졌던 도덕성, 순수성, 개혁성이 훼손됐다는 건 인정해야한다.
가치는 반한나라당이라는 것 이외에는 가진 게 별로 없다. 정책은 우파와 좌파 정책이 혼재돼 있다.
'보수의 노무현' 이명박에 맞선 대항마는 없었다
프레시안 : 문제를 이번 대선과정으로 좁혀보자. 대선 과정을 복기하면서 특히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인가.
손혁재: 반한나라당, 반이명박을 기치로 내걸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는 없었다. 지난 2002년 대선을 보면 이회창 후보는 부패정권의 타도를 내걸었고, 노무현 후보는 낡고 썩은 정치의 개혁, 권영길 후보는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을 애기했다. 권 후보는 먼 미래고, 노 후보는 가까운 미래, 이회창 후보는 과거를 얘기했다. 이 중에서 국민들이 선택한 것은 가까운 미래의 비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진보개혁세력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김호기 : 지방선거 이후 잘못 중 대표적인 것이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중도개혁세력에만 초점을 맞춰보자면 97년에는 DJ라는 노회하지만 우리를 대표할 리더십이 있었고, 2002년에는 노무현이라는 리더십이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없었다.
새로운 리더십을 준비도, 발굴도 하지 않았다. 선거도 싸움이자 전쟁인데 이끌고 나갈 리더가 없으니 지리멸렬은 예견됐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을 해체하고 대통합신당을 만들었지만 거기에 대해 전폭적 동의를 보내줬다고 하기 어렵고, 밖에서 문국현이라는 새로운 리더가 나왔지만 검증할 시간도 짧고, 민주화세력의 대표성도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대표성은 단시간 내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개인의 오랜 역사적 경험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안병진 : 2년 전에 여의도 정치인들에게 문국현 후보를 가지고 새로운 실험을 해보라고 조언했다가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 그 당시 문제의식이 이번 대선의 패배하더라도 진보세력의 골드워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6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골드워터가 민주당 존슨에게 참패를 당했다. (편집자 : 이후 공화당은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정치'를 내세우면서 기업, 교회 등 보수의 지지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10년 이상 집중 공략했다. 골드워터의 이런 전략은 현재 미국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골드워터가 있어서 1980년대 레이건으로 이어지는 보수의 전성시대를 맞을 수 있었다. 골드워터의 이념과 레이건의 이념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진보개력세력에게 이번 선거 패배는 어떤 면에서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또 이번 선거 이후에 앞으로 10년이 위험할 수도 있다.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어떻게 패배하느냐가 중요하다. 골드워터식으로 패배하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정동영, 문국현 후보 모두 한계가 있었다.
이명박 후보는 보수의 노무현이었다. 포퓰리즘으로 한나라당을 접수한 것이다. 반면 이쪽에서는 여의도로 쳐들어가는 후보가 없었다.
김호기 : 진보개혁세력에 기회가 과연 없었는가. 있었다고 본다. 작년 지방선거 이후 쇄신의 기회가 있었는데 못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 어떤 스탠스를 잡을 것인가. 결과론적 평가이지만 갈팡질팡했다. 현실에 안주했다.
올해 숱한 여론조사가 있었고, 여기서 다수가 원하는 것은 여전히 변화와 개혁이라는 점이 확인됐다. 이를 이명박 당선자가 가져갔다. 변화와 개혁은 이건 원래 진보의 것이다. 사실상 한국 진보개혁세력의 보수화가 이뤄진 것이다. 패배가 예정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있었는데 못 이뤘다.
안병진 : 나는 변화와 개혁이 진보의 것이라고 생각 안 한다. 진보와 보수 세력이 이를 놓고 치열한 헤게모니 싸움을 하는 것이다. 이명박 후보는 변화와 개혁에서 많은 모습을 보여줬다. 천민적 자본주의 세력은 천민적 여의도 세력보다 훨씬 빠르다.
또 진보적 아젠다를 정확히 제기하면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절반은 맞지만 또 석연치 않은 측면이 있다. 시민들이 진보적 정책을 선택한다는 것을 곧 진보의 지지율로 환치시킨다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캐리와 부시가 맞붙었을 때 의료, 교육 등 캐리가 모든 정책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걸 보면서 미국의 진보개혁적 지식인들은 당연히 부시가 패배한다고 애기했다. 천만의 말씀이다. 당시 중도적 유권자들은 부시가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알지만 그를 통해 자신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야비한 욕망, 테러리즘과 관계되는 사람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의 안정을 지키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걸 잘못 보게 되면 왜 부시가 당선됐나, 왜 이명박이 당선됐는가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층적 심리진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잘못된 전략전술로 나갈 가능성이 크다.
김호기 : 이번 선거는 사실 인물에서도 패했지만 정책에서도 패배했다. 보수 세력이 과거 보수 세력은 아니지 않나. 국민들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정책이 일자리, 교육, 주거, 노후대책 등이다. 과거 보수세력은 정책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에는 나름의 정책을 갖고 나왔다.
예를 들면 교육정책과 관련해서 다양한 욕구가 존재한다. 과거에 비해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기존의 3불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립과 공립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해야 하는 것인지 근본적으로 재검토 해야할 시점이다. 보수의 정책이 더 낫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번에 정동영 후보는 평화정책을, 문국현 후보는 일자리 정책을 얘기했다. 그것이 전부다. 정동영은 평화 이상의 어떤 것, 문국현은 일자리 이외 어떤 것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아이 캔 두 잇! '설득의 차별성'으로 승리한 이명박
손혁재 : 의견이 좀 다른데 이명박 후보는 정책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못할 수 있냐. 나한테 맡겨봐라. 내가 잘 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경제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최대한 부풀려 이명박한테 맡기면 다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 것이다.
앞서 예를 든 교육문제에서도 이명박 후보는 100개의 자립형사립고를 만들겠다고 했다. 자기 자녀를 자사고에 들여보낼 능력이 없는 사람도 박수를 친다. 내게는 더 부담, 내 자식에게는 더 부담이 되는 것을 국민들이 모르는 것이다. 이 후보는 정책의 차별성이 아니라 설득의 차별성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장 임기내 청계천을 했다는 것을 내세워 이명박의 이미지로 승부했다.
안병진 : 정책적 승부가 아니었고 이미지였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이명박에 대한 지지는 정책적 지지라기보다는 대중적 보수주의, 포퓰리즘적 보수주의라고 얘기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명박은 사람들에게 '나는 할 수 있다'(I Can Do It!)의 환상을 심어줬고 이를 이용해 성공했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위험스럽다. 이명박은 한나라당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 지지하기도 했지만 중도적 시민들의 보수적 욕구를 대변한다. 그들이 보기에 민주노총 내 귀족적 노조집단을 거꾸러뜨려 줬으면 하는, 공기업 등 귀족 공무원들을 정리해줬으면 하는 열망, 이런 부분에 대한 기대가 있다. 프랑스의 사르코지처럼 이에 부응해나간다면 이명박 정권은 상당한 헤게모니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프레시안 : 자연스럽게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전망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과거 대통령은 군인, 직업 정치인 출신이었다면 이명박 당선자는 기업 경영인 출신이다. 캠프에 삼성 출신인사들도 참여하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하는가. 또 이 당선자가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다고 보는가.
김호기 : 오늘 아침 뉴스를 보니까 정부 명칭을 '실용정부'로 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실용주의를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실용주의의 우파적 버전이 프랑스의 사르코지의 정책이고, 중도적 버전이 독일의 메르켈 정부다. 이명박 정권의 정책은 이 둘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할 가능성이 크다.
신자유주의적 실용주의의 대표적 우파적 버전이 대처리즘이다. 진보적 사회과학자는 대처리즘에 비판적이었지만, 이는 상당히 오래 지속됐다. 양면성이 있다. 국민들의 최대관심사인 일자리 창출 문제를 보면, 진보학자들은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 많이들 비판하지만 그래도 일자리를 만드는 건 성장이다. 규제완화가 이뤄지면 성장률이 현 수준에서 1% 정도는 재고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대중들의 요구에 일정부분 호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계화가 가져오는 양극화는 해소할 수 없다고 본다. 20대 80의 사회, 10대 90의 사회는 더 강화될 것이다. 이 문제가 2-3년 뒤에는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을 상당부분 잠식할 것이다.
전자의 경향이 장기화된다면 보수의 장기적 집권의 결과를 낳을 것이고, 후자인 양극화 심화 현상이 초반부터 나타나면 이명박 정부 5년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어떤 쪽으로 갈지는 이명박 정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손혁재 : 정치인들은 정치시장에 자기를 팔아야 한다. 아젠다를 만들고 자신의 것으로 가져자고 이를 실현시켜 추진력을 확인받아야만 국민들이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청계천이 이명박 당선자에겐 그런 것이었다.
한반도 대운하도 마찬가지다. 원래 이명박 당선자가 제기한 것이 아니지만 나올 때마다 실현가능성 등 문제로 깨졌다. 하지만 지금 국민들에게 '대운하=이명박'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청계천을 보니까 대운하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면 한국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 당선자가 추진력이 있을지 몰라도 정책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장기적 비전을 갖고 선택하기 보다는 당장의 가시적 성과에 집중하다면 국민 전체의 삶은 더 악화되는 양상을 보일 수 있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사회 양극화 문제는 더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안병진 : 이명박 정권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이는 우리나라 보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드러났듯이 삼성만 해도 21세기적 창조적 자본주의를 얘기하면서 내부 구조는 왕정체제다. 겉으로는 21세기를 얘기하면서 천민자본주의를 탈각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시야가 넓은 보수적 정책을 펼칠 수 있을까. 초기에는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한계가 보일 것이다. 특히 독선적 경향을 띠는 자수성가적 리더십과 결합된다면 파국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어느 쪽으로 갈지 가능성은 아직은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대선이 끝나자 마자 내년 4월 곧바로 총선이다. 총선을 앞두고 'BBK 특검'이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인데 어떻게 전망하나.
손혁재 : 국민들은 일단 선거가 끝나고 나면 너그러워지는 측면이 있다. 이걸 이용해 한나라당도 오늘 당장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문제제기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명박 당선자가 특검을 통해서 각종 의혹들을 털어버리지 않으면 리더십 행사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김호기 : 법과 정치의 논리는 분리돼야 한다. 대통령 선거는 정치, 특검은 법의 문제다. 특검과 관련해서는 여론의 향배가 제일 중요하다. 노 대통령이 다음 주 국무회의에서 이를 의결해야 하는데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두 개를 분리해서 결정을 내렸으면 한다.
'BBK 특검' 못지않게 중요한 뇌관이 '삼성 특검'이다. 한나라당도 정계개편 가능성이 있지만 범여권도 정계개편의 문턱에 와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가 '삼성 특검'이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정계개편은 물론 내년 4월 총선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본다.
'삼성특검'은 비자금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재벌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관련해 광범위한 공론의 장이 펼쳐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프레시안 : '삼성특검'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나.
손혁재 : 'BBK 특검'과 겹쳤기 때문에 검찰 입장에서도 둘 중 하나는 성과를 내야 하는 것 아니냐. 'BBK 특검' 보다는 성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4월 총선, 진보개혁세력이 '삼진 아웃' 당할 것인가
프레시안 : 현재 구도에서 총선에 대한 전망은 어떤가.
손혁재 :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87년 대선과 88년 총선을 얘기하면서 대선에서 한나라당에 권력을 줬기 때문에 이를 비판, 견제하기 위해 야당에 많은 표를 줄 거라고 관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고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된 뒤에 강력하게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면 정당과 국회가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설득한다면 더 호응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또 수도권에서 신당이 살아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본다. 자칫 잘못하면 한나라당이 2/3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고 신당은 호남, 이회창 당은 충청을 차지하고 창조한국당과 민노당은 비례대표 의석을 몇석 차지하는 과거 1.5당의 구도가 재현될 수도 있다.
김호기 :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구도, 조직, 인물이다. 이번 대선은 이명박 대 노무현 구도였다. 지난 지방선거와 대선을 통해 노무현 심판이 두 번 이뤄졌다. 그래서 유권자들이 두 번의 심판으로 이제는 됐다고 진보개혁세력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세번째 심판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이제는 됐다고 하면 구도의 변화가 올 것이라고 보고, 이명박 대 노무현의 구도가 유지된다면 참패할 것이다. 여러 가지 예상이 있는데 핵심은 이명박 대 노무현 구도의 유지냐, 소멸이냐다.
조직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번 선거에서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시각을 달리하자면 전통적인 진보-보수 양당체제에서 다당제로의 조정 국면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내년 총선 결과를 보고난 뒤 평가해야할 것 같다.
인물의 측면에서 보면 한나라당 주요 인물들의 무기는 전문성이고, 신당이나 범여권의 무기는 개혁성이다. 지난번 총선까지는 이 대결이 유효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유효하지 않을 측면이 크다.
내년 총선에서도 발본적인 변화를 하지 않으면 어렵다. 4개월이 짧은 기간이지만 기회는 있다. 오늘부터는 대선을 잊고 총선을 보수 대 진보개혁으로 치룰 수 있게 준비해야 하고, 새로운 지반을 만들어야 한다.
안병진 : 정동영 후보에게 BBK 특검과 총선이 마지막 동아줄로 작용하는 게 굉장히 불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과정 속에서 향후 5년이 만들어질 것이냐는 내년 총선을 봐야 하고, 그 점에서 발본적 변화가 총선에서는 큰 효과를 못 보더라도 그 다음을 위해서 필요하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총선을 거쳐 대단히 큰 위기가 올 것이다.
김호기 : 교두보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내년 총선에서 신당이 수도권에서 1/3은 얻어야 이른바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균형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미룰 것이 아니라 진보적 가치를 여전히 지향한다면 국민대토론회라도 열어야 한다. 이른바 정치사회, 시민사회의 진보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국민대토론회를 열어서 무엇을 잘못했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갈 지에 대해 계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프레시안 : 진보개혁세력이 대선에서 참패했는데 희망의 씨앗도 찾기 힘든 상태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있다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안병진 : 앞으로 10년 신진보를 만들어나가는 토대를 제대로 된 씽크탱크를 만들고 이걸 정치권이 실천해 나가고 국민들로부터 인정받는 선순환 구조를 얼마나 잘, 영양가 있게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미국 민주당이 92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제대로 된 씽크탱크인 DLC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국현 세력이 이런 점에서 기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김호기 : 정치는 서로 다른 이념과 정책을 가진 집단이 생산적 대립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수도 부분적으로 신보수가 됐지만 진보는 이에 대응해 신진보를 만들지 못했다. 신자유주의적 실용주의와 제대로 맞설 수 있는 가치전쟁을 준비하고 벌여야 한다.
손혁재 : 미래를 내다보면서 어떤 담론을 만들어 내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나가야 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제시가 소홀했던 것 아닌가 싶다. 한국 사회의 발전 방향과 새로운 담론과 아젠다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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