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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리를 내려놓은 '대한민국호', 지금 어디에 있나"

'충청은행 퇴직자'들의 삶으로 돌아본 IMF 10년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살인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왔다. 그 일 이후 10년을 돌아보던 김정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들에게 '은행 다녀요'하면 '아이고, 잘 됐네'라는 말을 듣던", '잘 나가는' 은행원이었던 김정태 씨다.

그랬던 정태 씨가 왜 '사람을 죽이고 싶은' 그 마음을 알 것 같게 되었을까.

순탄한 결혼생활도, 갓 생긴 둘째 아이도 그에게서 빼앗아간 '그 일'은 1998년 6월 29일에 벌어졌다. 온 나라를 휩쓴 외환위기(IMF) 직후였다.

정태 씨의 '자랑스런' 직장이었던 충청은행이 금융감독위원장의 발표로 하루 아침에 문을 닫게 된 5개 강제퇴출은행 가운데 하나에 들어간 것. 정태 씨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전체 직원의 65%에 달하는 945명의 충청은행원이 일시에 거리로 내 쫓겼다.

그들에게, 지난 10년은 어떤 세월이었을까. <문화방송(MBC)>이 IMF위기 10년 특집으로 오는 24일 밤 11시 40분부터 방송하는 프로그램 '그 배는 어디로 갔나'는 이들의 그 세월을 들여다봄을 통해 IMF 10년을 맞는 한국사회를 돌아본다.

제작진은 대전시민사회연구소, 빈곤문제연구소와 함께 이들의 삶을 추적했다. 945명 가운데 200여 명은 연락조차 되지 않았고 주소가 확인되는 750여 명 가운데 465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을 확인해나간다.

하루 아침에 다니던 직장이 시장에서 퇴출된 사람들
▲ 1998년 6월 29일 금융감독위원장의 발표로 전체 직원의 65%에 달하는 945명의 충청은행원이 일시에 거리로 내 쫓겼다. ⓒMBC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정리해고, 명예퇴직이라는 말은 어린 아이까지 아는 말이 됐다. 온 사회를 뒤흔든 구조조정이라는 칼날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실업자가 됐다. 그리고 꼭 그만큼 수많은 가정이 '눈물의 계곡'에서 헤매야 했다.

오죽하면 아침에 넥타이를 매고 나와도 갈 곳이 없어 오락실을 찾는 그 시대 아빠들을 다룬 한스밴드의 노래 <오락실>이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구조조정에 의한 대규모 정리해고가 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장현수 씨는 충청은행에 입사하자마자 군에 입대해 군복무 중에 직장의 시장 퇴출을 맞았다.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입사해 집에 생활비도 보태고 야간대학도 가려 했던 현수 씨는 제대 후 대학도 마쳤지만 나이 서른에 아직 청년 실업자다. 현수 씨는 "내가 능력이 안 돼서 그랬다면 또 모르지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한 젊은이의 미래를 국가가 강제로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것이다. '난파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호가 다 죽을 수는 없기에 누군가는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날벼락 이후 10년을 돌아보며 MBC 제작진이 유독 충청은행 퇴출자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IMF 10년을 맞아 가장 작은 얘기로 가장 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수많은 퇴출자들 가운데 이들 충청은행원은 어찌 보면 소수이지만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고 판단했다. 국가가 강제로 개입했고 평범한 화이트 칼라에 중산층이었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만든 한학수 PD의 말이다. 한 PD는 "이제는 국가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되물었다.

결혼 반지 팔고 막노동에 신용불량자로…"돌이켜보면 은행원이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제작진이 실시한 조사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들이 은행원 명찰을 버려야 한 이후 심각한 고용불안에 시달렸다는 사실이다. 응답자 가운데 지난 10년 동안 세 번 이상 직장을 옮긴 사람들이 54.2%나 됐다. 한 번도 직장을 옮긴 적이 없는 사람은 11.4%에 불과했다.

부부가 모두 은행원이었다 한꺼번에 퇴출당한 최재식 씨는 충청은행 퇴출 직후 과일장사, 택시 운전기사, 공장, 금융회사, 채권추심회사까지 모두 5차례 직장을 옮겨 다녔다. 그마저도 매번 비정규직이었다.

연구조사를 보면 이를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응답자의 32.9%, 총 153명이 현재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으며 정규직 종사자는 15.9%에 불과했다. 자영업이 27.1%(126명), 무직이 23.9%(111명)였다.

직장이 불안정하니 수입 또한 불안정하고 낮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퇴직 당시 도시근로자가구 평균소득의 1.5배를 벌던 이들이었지만 10년 후인 현재는 도시근로자 평균소득(2007년 4분의 3분기 평균소득이 373만 원)의 50% 수준인 186만1000원으로 추락했다.

신용불량자가 된 경험이 있는 사람도 18.3%(85명)나 됐다. 이 가운데 아직도 채무불이행 상태에 있는 사람은 45.9%(39명)이었다. 조사 보고서는 "은행원은 우리 사회 구성원 중에서 보수적인 편에 속하며 학력 수준이 높기 때문에 미래의 상황에 대해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대응할 능력이 있는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85명이나 신용불량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은 충청은행 퇴출자들의 삶이 그동안 얼마나 피폐해졌는가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 98년 당시 충청은행 본점에서 차장이었던 장준배 씨도 퇴출 이후 신용불량자가 됐고 결혼 반지를 아내 몰래 팔아야만 했다. 준배 씨는 "그때 차마 아내의 결혼 예물을 들고 나올 수가 없었다"고 했지만 제작진은 "이 부부가 남아 있는 결혼 예물은 앞으로 반드시 지킬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라고 되묻고 있다.ⓒMBC

98년 당시 충청은행 본점에서 차장이었던 장준배 씨도 퇴출 이후 신용불량자가 됐다. 퇴출 이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김밥집을 시작했지만 눈만 뜨면 새로운 김밥집이 생겼다. 결국 그는 '쫄딱 망했다.'

차비도 없던 그때 준배 씨는 아내 몰래 결혼 반지를 금은방에 내다 팔았다. 그리고 받은 돈이 25만6000원. "그때 차마 아내의 결혼 예물을 들고 나올 수가 없었다"던 준배 씨지만 제작진은 "이 부부가 남아 있는 결혼 예물은 앞으로 반드시 지킬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라고 되묻고 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은행원'이라면 대졸자이거나 상고에서도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만 달 수 있는 이름표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은행에서 쫓겨난 이들에게는 '퇴출자'라는 꼬리표만이 남았다. 그 꼬리표로는 이 사회에서 그들이 꿈꿨거나 이미 속해 있던 중산층으로 다시 들어갈 길은 묘연하기만 했다.

집도 팔고 아내도 떠나고…'차라리 세상을 떠나버렸던' 사람들

단순히 직장을 잃은 문제만은 아니었다. 여기 저기 전전긍긍하는 삶은 생활 그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뒤바꿔 놓았다.

은행 퇴출 당시 자기 집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74.6%였다. 10년 후인 지금은 57.6%만이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조사팀은 "생활 수준이 가장 낮은 사람의 주거 형태인 월세나 부모나 친지의 집에 얹혀 사는 무료임대의 경우 10년 전에는 13명(2.8%)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58명(12.5%)로 9.7%포인트가 증가했다"고 밝혔다.

사는 형편이 그렇다 보니 가정 생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퇴직 전후의 부부갈등 정도 변화에 대한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1.6%가 "퇴직 후 부부갈등이 더 심화됐다"고 대답했다. 이들 가운데는 결국 이혼까지 이른 사람이 22명(7.1%), 별거 경험자가 65명(21%)으로 나타났다.

정태 씨도 퇴출되던 해 생긴 둘째 아이를 가진 아내를 간신히 설득해 '어쩔 수 없이' 지우고 나니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 "살인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는 정태 씨의 마음은 바로 그 즈음에 솟아 올랐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다. 대전상고를 최상위권으로 졸업하고 충청은행에 입사했던 故 진영수 씨는 IMF 이후 10년의 한국사회의 질풍을 고스란히 작은 몸뚱이로 겪어야 했다.

'고졸 실업자'를 면하기 위해 야간대학을 다니며 매 강의마다 제일 앞 자리에서 수업을 듣던 영수 씨는 주식에 투자했다가 IT 주식 거품이 꺼지면서 순식간에 몇 억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결국 영수 씨는 아직 아내의 뱃 속에 있던 아이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빠가 죽은 뒤 태어난 아이는 엄마도 없이 할머니의 손에서 어느덧 5살이 됐다.

그들의 그 10년에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
▲ 충청은행 퇴출자인 김정태 씨는 "대한민국호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배에서 내리게 했다면, 그 뒤로 그 배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대한민국호'를 살리기 위해 버려졌던 사람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호는 과연 순항 중인 것일까? ⓒMBC

빈곤문제연구소와 대전시민사회연구소가 실시한 조사연구에서 응답자의 75.5%(351명)가 '현재 불행하다'고 대답했다. '과거보다 나빠졌다'는 사람이 81.2%인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워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과거에 비해 현재가 불행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43.3%)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고통 속에 보낸 그 10년 동안 그들의 삶을 강제로 결정했던 국가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국가는 무엇을 해 주었을까.

정부로부터 재취업 지원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응답자 465명 가운데 단지 7명(1.5%)뿐이었다. 직업훈련을 받은 경험도 겨우 86명(18.5%)밖에 되지 않았다. 정작 다함께 살기 위해 이들에게 배에서 뛰어내릴 것을 요구했던 국가는 그들의 생존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정태 씨가 "그 뒤로 대한민국호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학수 PD는 "당시 5개 은행에 대한 퇴출은 법률적으로도 하자가 있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정부는 퇴출 집행 후에 법을 개정해 소급하는 '불법'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제작진은 금감위에 당시 퇴출은행 선정과 관련된 자료에 대해 정보공개신청을 2회나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며 "금감위는 '영업상 경영비밀'이라고 통보해 왔지만 이미 10년 전에 망한 기업에 무슨 경영비밀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한 PD는 덧붙였다.

'대한민국호'를 살리기 위해 버려졌던 사람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호는 과연 순항 중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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