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민감 체질의 독자들에겐 스포일러가 될만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
한국의 영화 마케팅은 확실히 문제가 많다. 뻥튀기야 광고의 속성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필수 정보를 숨기는 경우라면, 그건 부도덕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믿는다. 하물며 영화다. 영화를 팔면서 관객들을 속이는 것은 양심 문제다. 돈이 좋다지만 그렇게까지 장사하면 욕 먹는다. 게다가 그건 관객 이전에 영화를 모욕하는 짓이다. <베오울프>의 광고나 포스터에는 이 작품이 3D 퍼포먼스 캡처 영화라는 표시가 없다. 다른 정보를 통해서도 이 작품이 CG가 많이 포함된 실사 영화로 오인될 여지는 적지 않았다. 굳이 알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 홍보면에선 오히려 불리한 정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실사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선택한 많은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당혹감이나 장르적 위화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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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
실제로 이 영화의 네티즌 리뷰는 실사로 알고 봤다가 애니메이션이라서 실망했다는 불만들 투성이다. 그래서 평점도 바닥권이다(그러므로 요즘 인터넷 평점은 거의 마케팅 방법론에 대한 평점이나 다름 없다). 이래서야 영화의 진면목이 제대로 공유될 수 없다. 편견과 배신감이 영화를 압도하는 현상의 대부분은, 마케터들이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영화 마케터들이여, 제발 푼돈 벌자고 영화를 모욕하지 말자. 이런 천박한 유통 논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정당한 가치 부여를 하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베오울프>는 놀라운 영화다. 퍼포먼스 캡처 기술의 진일보에 대해선 이미 익스트림 무비가 자세히 논한 바 있으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나는, 비단 표현력의 진화만이 이 영화에 쏟아부을 수 있는 상찬의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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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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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게르만 서사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베어울프>의 이야기는 미묘하게 은유적이다. 노골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부시 정권을 처연한 시선으로 조롱하는 영화다(라는 논지를 나는 지금부터 펼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혀 끌끌 차실 분들은 지금 읽기를 중단하고 나가시기를 권한다. 판타지든 역사물이든 영화는 결국 동시대성의 반영이라는 데 동의하신다면 계속 읽어도 좋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영웅 베오울프의 형상은 부시스럽다. 그는 허풍장이며, 힘의 논리에 경도된 자다. 황금 나팔의 화려함에 현혹되고, 마초 중에 마초이면서도 안고 싶은 여자 앞에선 한 없이 연약해지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3마리의 바다 괴물과 싸운 일화를 늘어 놓으며 9마리라고 떠벌리며, 자신의 일화를 전설로 만드는 것이 권력의 작동 원리라는 것을 영악하게 알고 있는 인물이다. 프로파간다의 효용을 간파하고 있는 셈이다. 골룸보다 더 흉측한 괴물 그렌텔을 무찌른 뒤, 그는 그렌텔의 어머니까지 물리치러 갔다가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에 홀려 간음한다.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드래곤으로 화해 왕이 된 또 다른 괴물 베오울프의 나라를 불태운다. 드래곤은 외친다. "아버지의 죄, 아버지의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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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울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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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걸 이렇게 해석해 봤다. 폭력으로 세워진 나라 미국은 그 피의 저주를 대물림한다. 미국은 한때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지원했던 후세인을 독재자로 몰아 전쟁을 일으킨 뒤 잡아 죽였다. 아버지 부시가 일으킨 걸프전을 아들 부시가 이라크 전쟁으로 상속 받은 결과다. 드래곤의 반격은 9.11 테러를 상징한다. 죄 없는 시민들이 묵숨을 잃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괴물 왕이 오래전에 지은 죄의 대가다. 베오울프의 충복이자 그에 이어 왕위를 물려 받은 위그라프 앞에 예의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그렌텔의 어머니가 나타난다. 그리고 '부와 저주의 상징' 황금 나팔로 그를 유혹한다. 황금 나팔은 위그라프의 손에 쥐어져 있다. 혹자는 속편을 예고하는 뻔한 결말이라고 했으나 영화가 위그라프의 선택을 보여주지 않은 채 끝나는 것은 매우 상징적일뿐더러 탁월하게 시사적이다. 굴복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진화된 기술력으로 재현한 영웅 신화를 통해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조국에게 은근히 묻는다. 폭력의 악순환과 저주의 상속을 끝낼 것인가 이어갈 것인가. 모두가 아는 프로파간다의 허상을 계속 우길 것인가 말 것인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근원적 저주를 다음 세대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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