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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현실 경험했기에, 피해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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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현실 경험했기에, 피해갈 수는 없다"

[범국민행동의날 릴레이 기고ㆍ끝] 평화 사진작가' 이시우를 만나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는 사람이 있어요?"

지난 5일부터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 3보 1배'를 진행하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회원들을 보며 시민들은 의아한 말투로 묻는다.

당장 지난달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했고, 현대가 북한과 합의해 내년 5월부터 서울~백두산 직항로를 이용해 백두산 천지를 관광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북과의 만남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요즘,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은 너무나 이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4월 19일 국가보안법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이시우 씨 역시 평범한 사진작가다. 수감 중 47일 동안 단식을 벌이며 국가보안법에 항거할 정도로 '신념이 투철한 투사'일 것 같지만, 그는 단지 분단의 아픔을 알리기 위해 비무장지대와 유엔사 등에 관한 사진을 찍었을 뿐이었다.

아픔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
▲사진작가 이시우 씨. ⓒ<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1992년 대선 이후 많은 활동가들이 현장을 떠났고, 이시우 씨가 활동하던 전국노동자문화운동단체협의회도 해체됐다. 그는 혼자 사무실을 지키는 외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전망이 불투명하던 그 때 이 씨의 친구가 "여행이나 같이 가자"고 해서 머리도 식힐 겸 따라간 곳이 철원평야. 그곳 눈 내린 평야에 철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 씨는 희망을 다질 수 있었다.

이 씨는 그 때 "철새들이 하늘에 길이 있어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면서 길을 만들어가듯이, 희망도 조건이 생길 때가 아니라 사소한 것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비록 전공이 사진이기는 했으나 이 씨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철새들을 보며 처음으로 '내마음속 풍경과 바깥 풍경이 하나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순간 함께 간 친구의 사진기를 빼앗아 사진을 찍은 것이다.

'수년간 통일운동을 해왔지만, 길바닥에서만 통일운동을 하지는 않았는가.'

이시우 씨는 분단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곳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민통선 사진을 찍기 시작하며, 그곳에 머물고 있는 대인지뢰, 고엽제 피해자 등 민통선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알게 됐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하면 풀 수 있을까.' 오랜 고민 끝에 그가 내린 답은 '유엔사'였다.

결국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분단의 아픔을 확인하고 사진을 통해 그 아픔을 해결하고자 했던 이 씨의 사진들이 자신의 구속을 불러온 셈이다.

"시대착오적 망령이 아직도 우리를 뒤덮고 있다"

이시우 씨가 3보 1배를 진행하던 11월 8일, 소위 '반공 할아버지'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등을 외치며 그의 앞 길을 가로막았다. 그날을 기억하며 이 씨는 "그 할아버지들 역시 국가보안법에 의한 피해자인 셈이니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했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해방 직후 한국 사회에 대해 "걸어 다니는 거대한 시대 착오증"이라고 비웃었다. 이 씨는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시대착오적 망령'이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국가보안법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를 입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구잡이로 국가보안법의 칼날을 휘두르는 수구 보수 세력들도 피해자라는 것이 이시우 씨의 지론이다.

체포당시 이시우 씨는 국가보안법이 가져온 수많은 아픔들을 어떻게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말하지 않다보니 먹지도 않게 되었다. 이 씨의 단식은 47일이 넘도록 이어졌다.

"무거운 현실 경험했기에, 피해갈수는 없다"
▲지난 9월 14일 출소한 이시우 씨는 다시금 신발 끈을 동여매고 국가보안법과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프레시안

7년 만에 남북의 정상이 다시 만났다. 국가보안법 폐지에는 이보다 좋은 조건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조용하기만 하다. 이 씨는 "분위기가 뜨지 않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위축돼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당장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국가보안법 폐지가 절박한 과제이긴 하지만 그 싸움을 또 하냐"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4년 1000여 명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폐지도, 재개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 겨울 칼바람 속에서의 수많은 사람들의 단식도 없애지 못한 국가보안법이라는 걸림돌을 무엇으로 제거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머뭇거리는 것은 그런 패배감 때문이라는 것이 이 씨의 비판이었다.

"조건이 만들어지길 바라기 보다는 조건을 만들어 가야합니다."

이 씨는 다시금 신발 끈을 동여매고, 국가보안법과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9월 14일 보석으로 출소하면서 이 씨는 찬 겨울을 철창 안에서 보내야 할, 남아있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단다. 그는 최근 감옥 안에서 집필하던 책을 마무리했다. 이 씨는 "책도 끝났으니 이제 국가보안법과의 싸움도 마무리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가 또 다시 국회 앞으로 향하는 이유다.

이 땅 모든 이들을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굴레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마음 깊숙이 그를 짓누르는 슬픔을 없애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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