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민주노총 5층의 금속노조(위원장 정갑득) 사무실 앞에서 지난달 16일부터 한 사람이 단식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보통 노동자가 단식을 하면 요구하는 대상은 사용자나 정부다. 100이면 99가 그렇다. 아니, '모두가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20일이 넘도록 진행 중인 이 단식은 대상이 금속노조다. 단식을 하는 사람도 금속노조 조합원이다.
그는 금속노조 기아자동차비정규지회 부지회장 이동우(31) 씨였다.
기아차비정규지회라는 말을 듣고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는 지난 8월, 9일 동안 비정규 노동자들이 화성공장 도장라인을 점거하고 생산라인을 중단시킨 채 임단협 체결을 요구하던 장면과 그 끝에 나온 금속노조 최초의 조직통합 합의였다. (☞관련 기사 :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전면파업)
또 하나는 얼마 전 기아차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비정규지회와의 조직통합 합의가 정규직 대의원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간 장면이었다. (☞관련 기사 : 정규-비정규직 통합, 역시 멀고도 험했다)
그 두 가지 장면들을 되짚어 가면서 이동우 부지회장의 단식의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다. 기아차노조와의 조직통합 합의와 대의원대회 부결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오히려 파업 이후 임단협 교섭조차 한 번도 이뤄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가 왜 하필 금속노조 앞에서 20일이 넘도록 단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동우 부지회장을 그의 단식 18일 째였던 지난 2일 금속노조 앞에서 만났다.
금속노조의 첫 조직통합 무산, 그 전후로 벌어진 일들
그에게 왜 하필 이 곳에서 단식을 하느냐고 물었다. 궁금했다. 그의 입에서는 지난 기아차지부의 임시대의원대회 이후 얘기가 쏟아져나왔다.
그의 입에서 먼저 나온 것은 선거권 얘기였다. 조직통합 무산 이후 기아차지부가 지부대의원 선거과 금속노조 대의원선거 투표권을 지부에 직접 가입한 사내하청 노동자에게만 부여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 이동우 부지회장은 "이는 결국 비정규지회를 해산하고 기아차지부에 집단적으로 직가입하라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동우 부지회장이 속해 있는 기아차는 금속노조의 1사1조직 원칙을 가장 먼저 실현시킨 모범사례로 꼽혔었다. 현장 대의원들의 손에 의해 이 원칙이 좌절된 지난달 9일 임시대의원대회 전까지는 그랬다.
조합원이 15만 명인 대형 산별조직으로 새롭게 출범한 금속노조는 하나의 사업장에 하나의 노동조합을 둔다는 1사1조직 원칙을 만들었다. 1차 하청 및 2,3차 하청의 활성화로 같은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소속이 다른 노동자들 사이의 통합을 위한 원칙이었다.
이는 정규직노조의 '전투적 실리주의'에서 비롯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산별로 풀어가겠다는 금속노조의 첫 다짐이기도 했다. (☞관련 기사 : 신임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 인터뷰 "정규-비정규 갈등, 산별로 풀 수 있다")
이동우 부지회장은 비정규지회 조합원들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기로 한 기아차지부의 결정이 이런 금속노조의 산별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 보였다. 즉, 직접 가입만을 인정하기로 한 지부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처한 현실은 다른데 똑같은 '조합원' 명찰만 달아준다고 같아질까?"
그것이 왜 문제일까? 직접가입이든 지회와 지부의 조직통합이든 하나의 조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닐까? 더욱이 개별 조합원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기아치지부 조합원' 명찰을 달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동우 부지회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정규직 조합원과 비정규직 조합원 사이의 구별이 없는 완벽한 통합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눈속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처한 현실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의 처지가 다르고 그에 따른 요구사항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하나로 뭉뚱그려 놓으면 다수가 힘을 가지게 된다. 즉, 비정규직의 목소리는 묻힐 수밖에 없다. 이동우 부지회장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둘러싼 환경과 조건이 다른데 똑같은 '조합원' 명찰만 달아준다고 그 환경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직접 가입만을 통한 통합은 사용자들이 가장 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직가입으로 비정규직의 목소리가 정규직 안에 들어가게 되면 비정규직만의 요구사항을 걸고 싸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기아차비정규지회가 직가입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금속노조 위원장 지침이 지부에서는 무시되는 것이 현실"
단식까지 하면서 그가 금속노조에 요구하는 것은 기아차지부의 이 같은 행보를 제어해달라는 호소였다.
그는 "기아차지부는 정갑득 위원장의 지침까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갑득 위원장은 최근 공문을 통해 기아차지부에게 "금속노조 대의원 선거에 비정규직 모두에게 선거권을 주거나 아니면 선거를 잠시 유보하라"는 취지의 지침을 전달했지만 지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그가 앉아 있는 벽 뒤로 붙어 있는 각종 구호들 가운데는 "기아차지부를 징계하라"는 구호도 들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단위사업장에서 금속노조의 지침을 무시한 사례는 많다고 그는 덧붙였다. "최근 결성된 GM대우 부평공장의 비정규지회도 정 위원장이 승인한 조직인데 지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비정규지회의 간부들을 교섭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면 금속노조 15만 조직이 당나라 군대가 된다"며 "일련의 사례들이 민주노조 운동의 정신까지 훼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비정규직 도와주자'는 관점 버려야"
지부와의 조직통합 결정이 부결된 대의원대회에서는 조합원 범위에 대한 논란까지 나왔다고 이동우 부지회장은 전했다. "식당 노동자 및 2,3차 하청 노동자까지 포함시키는 것은 곤란하지 않냐"는 주장이었다.
이 부지회장은 "1차 하청은 되고 2,3차 하청은 안 된다는 주장의 논리는 2,3차 하청이 단일법인이 아닌 상장회사라는 것이었지만 실제 본심은 정규직노조가 2,3차까지 책임지기는 어렵다는 것 아니었겠냐"고 추정했다.
1차 하청노동자보다 2,3차 하청 노동자는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 부지회장은 "기본급도 최저임금을 겨우 상회하는 수준이고 워낙 소규모가 많아 원청조차 정확한 규모와 업체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자신이 지난 2004년 2,3차 하청업체 노동자로 기아차에 첫 발을 내딛었기에 "근로기준법 적용은 꿈도 못 꾸는" 2,3차 하청노동자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일 경우 더 '힘든' 싸움을 정규직노조가 껴안아야 하는 부담 때문에 정규직 조합원들이 머뭇거린다는 것.
이날 대의원대회에서 오가는 정규직 대의원들의 논란을 지켜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비정규직의 고통을 보듬어 안겠다'는 금속노조의 산별정신이 '비정규직을 도와주겠다'는 시혜적 관점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와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 것이 안정적으로 보장이 될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노조 간부들부터 '비정규직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가 대형 산별노조로 거듭난 금속노조 내에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