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했을 것이다. 엔딩 크레딧이 뜨기도 전인데, 영화가 대충 끝나려나 싶으니까 성미 급한 관객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다. 극장 문을 나서니 여기저기서 지청구다. "아우, 짜증나." "뭐이야~이거!" 사실 어느 정도는 그럴만 했다. 아무리 영화제용 영화라지만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렇다할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 <빨간 풍선>은, 자다 보고 자다 봐도 별 일이 없다. 막말로 허우 샤오시엔이니까 뭐 있겠지 싶어 인내심을 발휘하게 된다. 이건 그냥 한 엄마와 아이, 그리고 그의 중국인 보모의 일상이다. 식사하다 수다 떨고, 월세 내지 않는 아랫집 남자 쫓아낼 궁리 하고, 아랫층의 피아노를 윗층으로 옮기고, 맹인 조율사가 와서 조율하고, 아이는 플레이스테이션 하면서 놀다가 누나랑 통화하고, 뭐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가끔 인형극 목소리 연기자인 엄마의 연습 장면과 아이 데리고 영화 찍으러 다니는 중국인 보모 아가씨의 외출이 나오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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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풍선 |
줄리엣 비노시 많이 늙었네, 고 아들 놈 참 예쁘게 생겼네, 정도의 감흥으로 버티기겐 두 시간이 너무 길지 않을까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가끔 빨간 풍선 하나 띄워 놓고 피아노 곡 BG 깔면서 줄곧 보여주는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잘 가늠이 안된다. 영화 보기 전에 들춰본 영화제 메인 카탈로그에도 "허우 샤오시엔은 이제 범세계적인 보편적인 주제에 도전하고 있다"는 알쏭달쏭한 설명만 있을 뿐이다. 대관절 '범세계적인 보편적 주제'라는 게 어떤 것이란 말인가. 어느덧 영화라는 매체에 무조건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약 1시간을 헤맨 끝에 이 영화에 대한 나의 감상 전략을 고쳐 먹었다. 그랬더니 영화가 흥미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흔히 우리가 영화적 소재로 기대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일상의 한 지점에서 파열되는 것이여야 한다. 사실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그것도 사실은 크고 작은 사건의 연속이다. 일상성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의 상상력은 그 사이를 파고 든다. 마치 풍선처럼 인물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물끄러미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프레임 안과 밖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모색하는 상상력의 부유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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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풍선 |
감독은 그 몫을 관객에게 툭 던져 놓고, 내 의도가 무엇인지, 내 시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읽어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연속 그림이 당신에게 어떤 감성의 파장을 새겨 놓고 있는지 자문해보라고 하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관객의 능동성을 부추기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 능동성은 풍선처럼 부유하는 응시에서부터 시작된다. 감독의 시선이자 상상력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이 바로 그 응시를 공통 분모로 해 넉넉한 거리를 유지하며 교차하고 소통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행위의 본질이 바로 그런 데 있지 않겠냐는 거다. 대부분의 대중 영화에 기대 되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짜릿한 흥분과 쾌감은, 굳이 관객의 능동성을 부추기지 않는다. 귀차니스트 관객들이 해야 할 일이라곤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손으로 열심히 팝콘을 입 안으로 배달하는 것 뿐이다. 거기에는 영화를 보는 주체인 '나'는 빠져 있기 십상이다. 어느새 나를 빼놓게 만드는 영화에 길들여진 나에게, 그리고 서둘러 상영관을 빠져 나가는 관객들에게, 허우 샤오시엔은 슬며시 묻고 있는 것 같다. 성찰적 응시와 능동적 사유를 동원한 영화 보기가 댁들에게 그다지도 힘든 거냐고. 뜨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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