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학교 보내려고 돈 벌고 있을 니들 부모님이 불쌍하다야."
"당당하면 마스크 벗고 하지?"
"좋은 말 할 때 가라."
10일 서울 신촌 이랜드 본사 앞. 열 명이 채 못 되는 10대 청소년들이 이랜드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아저씨 왜 반말하세요?", "기자회견 방해하지 말아주세요"라는 하소연은 이랜드 본사 직원들의 '막말'과 '비아냥'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 30분, 이랜드 본사 앞에서는 10여 명의 청소년들이 '비정규직 저주를 풀기 위한 청소년 119 선언' 기자회견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114명의 청소년이 서명한 선언문에 적힌 "경찰에 의해 온 몸이 들려서 끌려 나오는 노동자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절규를 들었습니다.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그들의 절규가 가슴에 깊은 소용돌이를 일으켰습니다"는 글은 이들이 왜 이곳을 찾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 왔니?" "학교도 안 다니니 이 꼬라지지"
하지만 예정됐던 시간보다 다소 늦은 11시 45분, 이들이 기자회견을 하려고 하자 본사 직원들의 '방해'가 이어졌다.
"오늘 우리는 악덕기업 이랜드를 비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사회를 맡은 한 중학생이 입을 떼자마자 본부 소속 직원 이모 씨가 "악덕기업이라니? 사과하라"며 말을 가로막았다. "악덕기업 앞에 와서 악덕기업이라고 하면 기분 좋니? 너는 너희 아버지 앞에 가서 '나쁜 새끼'라고 하냐?"는 것이 이모 씨의 주장이었다.
세 명의 청소년 발언과 기자회견문 낭독이라는 짧은 순서를 진행하는 동안 이랜드 직원들의 이 같은 방해는 이어졌다. "법적으로 기자회견은 신고하지 않고서도 어디서든 할 수 있다"는 청소년들의 설명도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는 이들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아냥도 이어졌다. "청소년? 니들 정말 학생 맞아?", "누가 시켜서 왔니?", "쓰레빠(슬리퍼) 끌고 와서 이게 뭐니?", "비정규직 되기 싫으면 공부해야지, 이러면 돼?" 등의 발언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또 다른 본부 직원 김모 씨는 "학교도 안 다니니 이 꼬라지지"라는 말도 이들에게 퍼부었다.
"역시 듣던 대로 이랜드답다"
청소년들은 짧은 발언 도중 곳곳에서 이런 '소동'이 벌어져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저희 어머니들이 비정규직법 때문에 모두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그분들의 생계는, 자식들은 어쩌란 말이냐"며 발언을 시작한 한 여학생은 이런 소동과 훼방이 이어지자 "나 못하겠어"라며 마이크를 내려놓기도 했다.
이랜드 직원 이모 씨는 기자회견 도중 "너도 한 마디 해, 늦게 왔으니까"라며 '순서 참견'까지 했다. 12시 10분 경, 직원들이 본격적으로 "이제 됐지 않냐?"며 "좋은 말로 할 때 가라"고 이들을 다그쳤다. 들고 있는 현수막을 걷어가려 하고, "반말하지 말라"며 항의하는 청소년을 몸으로 밀어붙여 밀치기도 했다.
기자회견장 주변에는 경찰도 출동해 있었지만 이런 소동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렵사리 준비했던 기자회견을 마친 청소년들은 "역시 듣던 대로 이랜드답다", "이랜드가 어떤 기업인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됐다"고 말했다. 한 여학생은 "얼마 전 홈에버 야탑점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도 그랬고 오늘도 직원들이 우리에게 '노조랑 무슨 관계냐'고 했지만 우리는 정말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왜 정부도, 경찰도, 법원도 이랜드 편인가요?"
이 청소년들은 왜 이랜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랜드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까지 열게 된 것일까?
이날 '청소년 119 선언'에 참석한 한 청소년은 "농성장에서 끌려 나오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그분들이 왜 그렇게 비참하게 끌려나오는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뉴스를 찾아보고 자세히 알아보니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량해고한 악덕기업 이랜드가 더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청소년 119 선언문'에서 "정부도, 경찰도, 법원도 비정규직 노동자의 편이 아니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부라면 노동자들을 위해 일해야 할 텐데, 노동자들이 쫒겨나고 차별 받는 일터에서 벌이는 정상한 권리 행사를 불법이라고 하고 안 나오면 강제로 끌어내겠다는 협박만을 일삼는 것은 힘 있는 기업의 편을 드는 일이 아닙니까? 경찰도 마찬가집니다. 농성장으로 쳐들어가 사람들을 끌고 가는 건 조폭이 하는 짓과 뭐가 다른가요? 노동자들이 사업주가 못된 짓을 해서 고발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더니 파업을 하니까 불법이라고 하는 법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이 모든 폭력과 억압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게 너무나 화가 난다"며 "진정한 공권력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쓰여야 하며, 힘 있는 자들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보호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우리 또한 미래의 비정규직입니다"
이들이 여기까지 나오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청소년 또한 미래의 비정규직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판단도 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비정규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을 하다 다쳐도 산업재해보험처리도 받지 못한다"며 "이처럼 비정규직 문제는 성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걸려 있는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들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랜드 그룹이 아무리 할인을 해줘도, 사은품과 할인쿠폰을 아무리 많이 줘도, 사회적 약자들과 우리의 미래마저 짓밟는 기업이 파는 상품을 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위 친구, 가족들과도 이랜드 불매운동을 함께 하고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폭력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겠다"고 밝힌 이들은 이날의 경험을 어떻게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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