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법을 피해 가기 위한 이랜드 그룹의 계약해지 후 외주화에 맞선 이들의 싸움이 사회갈등으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충분히 예견됐던 사태를 사실상 방치해놓고 해법을 찾는데도 무기력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28개 시민사회·여성단체는 10일 오전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비정규직법의 허점으로 인한 사업주의 집단해고와 외주전환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지금까지 대책마련 없이 사태를 방관해 왔다"고 비난했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일단 노조가 아무 조건 없이 농성을 푸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랜드 그룹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어 이랜드일반노조는 "노동부마저도 이랜드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상수-이석행 만남, 서로 입장차만 확인
사태가 장기화되고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9일 저녁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상수 장관과의 면담이 이뤄졌다. 이 만남도 민주노총이 먼저 요청해 이뤄진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사태의 빠른 해결을 위한 민주노총과 노동부의 역할은 노사 대표들 간의 진실하고 책임 있는 교섭의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판단해 노동부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면담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만남 자체는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이날 40여 분간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이뤄진 면담에서 양측은 입장차만 확인했다. 이 장관은 노조의 '무조건적인 농성 해제'만을 되풀이 했다.
이 위원장은 노조가 점거농성을 풀기 위해서는 △대표이사의 교섭 참가 △노조 간부 6명에 대한 고소·고발 취하 및 교섭기간 신변보호 △계약해지자의 복직 등 교섭에서의 진전이 어느 정도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노동부가 만든 법 무력화시키려는 사용자를 노동부가 옹호?
정부의 이같은 태도에 대해 노동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차별없는 일터, 비정규직보호법이 만들어갑니다"라며 자랑하고 있는 정부가 비정규직법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각종 수법으로 법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기업들을 막기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비판이다.
이랜드일반노조는 9일 이상수 장관의 발언에 대해 "노조는 노동부가 그렇게나 자랑하고 홍보했던 '비정규직보호법'의 취지에 따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시정을 요구했을 뿐"이라며 "노동부 그 자신들이 작성한, 법에 보장된 차별시정을 요구한 것이 이상수 장관의 말대로 '무리한 요구'냐"라고 반박했다.
최근 진행 중인 이랜드 노사대립은 기본적으로 회사가 비정규직법의 2년 고용 후 정규직화 등 차별시정제도를 피해가려다 벌어진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노사 갈등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면 비정규직법 자체가 현장에서 무력화될 것은 뻔한 수순이라는 것이 노동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28개 시민사회·여성단체도 10일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법제정과 더불어 법을 입법취지에 맞게 정착시킬 책임이 있다"며 "이랜드 사건은 비단 한 사업장 차원의 문제를 넘어 비정규직보호법이 제대로 정착되는가의 여부와 관련이 있는 만큼 정부는 보다 책임 있는 자세로 중재와 조정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관은 사실 확인부터 제대로 하라"
이상수 장관이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장관은 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조도 단계적 사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조는 "임금교섭 과정에서 2~3년 간의 단계적 차별시정을 제안한 것은 노조이며 회사는 교섭이 시작된 4월부터 현재까지 임금동결만을 고집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노조는 3개월 이상된 사람은 다 정규직으로 하라고 하는데 회사 입장을 고려해 2년 이상 정규직화를 받아들였으면 한다"는 이 장관의 발언도 사실이 아니라고 노조는 주장하고 있다. 이랜드일반노조는 "노조는 3개월 이상된 사람을 모두 정규직화하라고 요구한 일이 결코 없다"며 "장관이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반발했다.
노사 양측은 10일 오후 다시 교섭을 벌인다. 이 장관은 이날 오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이랜드 사측 대표와의 비공식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장관은 "양측이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전달했다"며 "분위기가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랜드일반노조 관계자는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현재까지 전혀 회사로부터 들은 얘기가 없다"며 "현장에서는 공권력 투입 등에 대비해 교육 중인데 무슨 말이냐"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성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용보장 요구가 이날 오후 열릴 교섭에서 이 장관의 말대로 좋은 결말을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하지만 이랜드사태가 잘 마무리되더라도 비정규직법을 피해가기 위한 무리한 외주화와 이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이라는 '모순'은 여전히 남는다. 제2, 제3의 이랜드 사태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수 장관이 "매장 점거는 명백한 불법 행위"와 같은 얘기보다는 이같은 법 회피 사용자에 대한 대책 마련에 더 골몰해야 할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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