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성희롱에도 '계급'이 있는 것일까?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유학생으로 KBS <미녀들의 수다>의 출연진인 일본인 여성 준코 씨가 대학 강사로부터 성희롱 발언을 들은 적이 있다고 폭로하면서 커다란 논란이 벌어졌다. 해당 학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는 다음날 곧바로 진상조사위원회를 열고 해당 강사 김모 씨를 파면 조치했다.
하지만 같은 학교가 국가인권위원회까지 인정한 성희롱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로 오랜 시간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 이중적 태도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같은 학교, 같은 여성, 같은 성희롱
준코 씨는 지난 25일 방송분에서 "대학교 1학년 때 수업에 몇 번 빠졌더니 담당 교수가 '나랑 같이 자면 수업에 한 번도 안 나와도 성적을 주겠다'고 말했다"고 고백했다.
그 이후 외국어대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으며 학교는 신속히 조사위원회를 가동했다. 외대 측은 이튿날 "방송 내용의 상당부분 신빙성이 있으며 해당 강사가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강사 김모 씨를 파면했다.
그런데 이날로부터 꼭 1년 전인 지난해 6월 26일에도 외대에는 유사한 성희롱 사건이 있었다.
파업 중이던 외대 노조의 한 여성 노동자에게 이모 교수가 "가슴 보인다. 가슴이나 닫고 다녀라"는 발언을 해 성적 수치심을 준 것이다. 가해자였던 이모 교수는 다른 여성 조합원에게도 "예쁜 것하고 얘기하니까 말도 잘 나오네"라며 성희롱적인 발언을 했다.
당시 한국외대 노조는 학교의 일방적인 단협해지 통보와 조합원들에 대한 파면, 해고, 정직 등의 중징계에 맞서 100여 일 째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학교의 태도는 너무 달랐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학교 측의 태도는 준코 씨의 경우와 너무나 달랐다. 성희롱이라는 노조의 항의를 묵살했고, 이 사건을 학내에 대자보로 게재한 학생에겐 무기정학의 징계를 내렸다. 이유는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이 사건을 진정한 피해자 신모 씨(가명) 역시 올해 2월 해고됐다. 신 씨와 함께 해고된 10명의 조합원 가운데 신 씨에게는 '명예훼손'의 사유가 더 붙었다.
똑같은 '명예훼손'의 항목이 준코 씨의 경우에는 해당 강사에게 적용됐지만, 노조 조합원이 당한 성희롱 사건에서는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붙여졌던 것이다.
학교의 태도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성희롱 인정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4월 13일 "파업과정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모 교수가 여성 조합원에게 행했던 부적절한 행동을 성희롱으로 인정하고 가해자인 이모 교수는 인권위원회가 주관하는 특별인권교육을,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은 해당 교수에 대한 경고 조치와 재방 방지를 위한 계획을 제출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모 교수는 인권위의 특별인권교육을 받지도 않았으며 박철 한국외국어대 총장은 어떤 경고 조치나 재발 방지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는 인권위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행정소송까지 준비 중이다.
한국외대 "사건마다 맥락이 있는 만큼 같은 성희롱 사건이 아니다"
피해자 신모 씨는 28일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준코 씨의 사건을 학교가 신속하게 처리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당한 사건에 대한 학교 측의 태도를 생각하면 마음이 참담하다"고 털어놨다.
신 씨는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그 기억들인데 이번에 나타난 학교의 태도를 보면서 '힘 없는 노동자의 처지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절감해 화도 나고 슬프다"고 말했다.
학교 관계자는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사건마다 맥락이 있는 것인데 같은 성희롱 사건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인권위의 권고도 노조의 일방적 주장만을 근거로 한 것인 만큼 문제가 있다"고 해명했다.
공교롭게도 한국외대가 준코 씨 사건의 강사를 해임하기로 하고 유감 성명을 발표한 날은 김지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박철 총장을 만나 신모 씨의 사건에 대한 학교의 태도에 항의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갔던 그 날이었다. 하지만 김지희 부위원장과 박철 총장의 면담은 이뤄지지 못했다.
심각한 성폭행에 노출돼 있는 여성 이주노동자는?
사실 이같은 문제는 같은 외국인 여성들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외국인 여성이라 할지라도 준코 씨와 사뭇 '다른'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더 심한 일을 겪고도 하소연할 곳도 없고, 그 하소연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없다.
유학생이자 TV 출연으로 유명해진 준코 씨와 달리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성희롱 및 성폭행 피해에 우리 사회는 냉담하다.
지난 2005년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성 이주노동자 10명 가운데 3명이 성폭행을 실제로 당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준코 씨가 경험했던 언어를 통한 성희롱보다 더 심리적·육체적 고통이 심각한 성폭행을 경험한 여성 이주노동자가 30%인 것이다.
지난 2002년도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의 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0.4%가 신체를 만지는 폭력을 당했고, 그 중 55.6%가 한국인 직장상사로부터 그런 일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철승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의 공동대표는 "여성 이주 노동자들의 직장 내 성희롱은 각종 실태조사를 통해 이미 많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이나 정부 등 행정기관이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다"며 "유학생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반응해주는 것과 비교해 봤을 때 이중적인 태도"라고 비판했다.
같은 여성이지만 노동자들은 성희롱 등 성폭력 문제에서도 더 서러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체념해야 하는 것일까. 비록 준코 씨의 가슴 아픈 경험은 일단락되는 듯한 모양새지만 또다른 피해자들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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