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도 예외는 아니다. '새로운 보수와 선진화'를 외치던 유력 대선주자들이 '권력 느와르' 시절에 빚어진 온갖 의혹과 시비에 휘말리며 '고초(?)'를 당하는 장면들은 익숙하다 못해 이제 친근감마저 느낄 지경이다.
물론 이번 대선의 이슈들이 과거와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문제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대표적 'DJ아젠다'라고도 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가 이번 대선의 핵심이슈가 되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당연하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4년 여 동안 주장해 오던 정치개혁과 언론개혁 역시 완결되었다고 볼 수만도 없는 만큼 이번 대선에서 또 다시 핵심적 쟁점이 될 수도 있는 문제들이다.
물론 자신들의 시대가 멀어져 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그들의 모습이 '권력욕'으로 비쳐질 가능성은 적지 않다. 또 권력욕이 아닐지라도 새로운 예비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화두를 던질 만한 공간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세간의 여론이기도 하다.
여론조사 상 국민 여론 역시 두 사람의 적극적 정치활동에 대해 부정적이다. 지난 달 29일 KSOI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69%,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행보에 대해서는 65%가 잘못하는 일이라고 응답한 조사결과는 이러한 국민의 착잡한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나라당은 또 다른 재탕정치로 유권자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10년 만에 정권탈환의 꿈에 부풀어 있던 한나라당은 애써 달라진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전에 다시 예전의 '그 때 그 위기'에 다시 빠져 허우적거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 동안 보수의 새로운 가치로서 성공과 신화, 그리고 CEO리더십을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하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과거의 덫에 걸려들어 크게 곤욕을 치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 역시 이러한 검증 공방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마치 고전적 설정처럼 재등장하는 한나라당의 '도덕성' 문제는 그걸 꾸미고 조장하는 이들이 따로 있다 해도 남을 탓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궁극적으로 고도성장 시기에 '정치적 도덕성'을 폐품처럼 내팽개쳐뒀던 권위주의적 정치세력 스스로의 원죄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유독 검증단계만 되면 약한 모습을 보이는 한나라당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권자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메아리 없는 '대통합'
그러나 지금 대선 정국에서 가장 한심한 것은 자신이 내건 시대의 화두에 천착하는 두 사람의 대통령도 아니고, 원죄의 수렁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는 한나라당의 두 후보도 아니다.
과거, 또는 과거가 되어가는 지도자들을 극복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지지도를 유지하기 위해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야당 후보도 이기지 못하는 비(非)한나라당 진영의 대선주자와 일곱 난장이와도 같이 왜소한 모습으로 '호남'을 맴도는 여러 정치세력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구여권은 '대통합'이라는 명분으로 결국 2002년의 민주당, 즉 동서대결 구도를 재연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처럼 되어 있다. 물론 한국 정치구도의 현실이라는 것이 양자 간의 박빙승부로 이뤄지는 만큼 이른바 '대통합'의 구도를 짜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기본이라는 점도 이해는 간다. 또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모멘텀인 대통령 선거에서 진부하냐 재미있느냐가 문제가 아닌 것도 설득력이 있다.
다만, 그 대통합이라는 것이 결국 크게 보면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분열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알려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스스로 인정했던 그 '실패한 정치실험' 이후의 정치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한나라당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 외에는 메시지가 없다. 특히 호남을 중심으로 말이다.
새로운 정권의 권력을 마음껏 독차지하기 위해 당을 만들었다가, 이제 질 것 같으니 다시 합치자는 그 줄거리는 국민에게 감동은커녕 불쾌감마저 줄 가능성이 높다. 아닌 게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비한나라당 진영의 통합에 대한 찬반 여부와 별도로 정계개편 자체에 대한 '관심도'는 형편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기기 위한 정계개편'에 대한 국민의 썰렁한 반응을 반증한다.
그들의 오류
검증의 계절만 돌아오면 과거의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수난을 당하는 한나라당은 별개로 치고, 현 시점에서 비한나라당 진영의 오류는 3가지 측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지금 국민은 언제든 변할 준비가 돼 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것은 궁극적으로 조직과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3김의 정치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 에 녹아 는 극적 요소를 국민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2004년 총선에서 탄핵이라는 거대 사건을 배경으로 단지 30여 석에서 150석을 만들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금 우리 정치는 아젠다를 중심으로 역동성을 가진 여론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 또다시 조직을 모으고 호남을 합쳐 영남을 상대하려는 전략은 이런 점에서 퇴행적이며 과거 승리의 향수 속에서 쉽게 다시 재미를 보려는 얄팍한 리메이크 상술을 연상케 만든다. 지금은 대선주자가 제대로 된 콘텐츠를 보이면 언제든지 지지도가 올라 갈 수 있는 그런 시대다.
이런 점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두 번 째 오류가 바로 대선주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침묵의 룰렛게임'이다. 아무도 자신의 목소리는 없는 대신 조용히 조직을 만들면서 기회를 엿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젊었을 때부터 외치던 남북연방제와 같은 위험한 소신도, 지역주의 정치만큼은 못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아둔한 용기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새로 판이 짜여지면 거기서 승리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만이 비한나라당 진영의 대선주자들을 지배하는 듯하다.
물론 한나라당 후보가 결국 스스로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과거처럼 무너져 내린다면 어부지리의 승리를 얻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외부의 상황변화일 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택할 모습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비한나라당 진영의 '대통합'은 아무런 내용도 감동도 없이 일단 물리적 틀만 만들어 놓고 기다리면 멍청한 적에 의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수주대토(守株待兎)' 프로젝트라고 이름붙일 만도 하다.
마지막으로 정계개편에 대한 접근방식이 조악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동안 열린우리당은 지난 3년 동안 얼마나 스스로 재미없고 쓸모없는 정당이었는지를 충분히 확인해 왔다. 사실 지금의 우리 정치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양적인 부족함이 문제가 되는 정치가 아니다. 국민을 감동시키는 콘텐츠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콘텐츠만 좋으면 지지도는 언제든지 회복할 수 있고, 새로운 감동을 주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이 나타난다면 얼마든지 그 힘을 기반으로 대통합을 만들어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반면, 각자가 알량한 지분에 기대 생존에 애를 쓰면서, 과거의 많았던 국회의원 수에 대한 환상 속에서 의미 없는 대통합을 추진하는 주인 없는 비한나라당 진영의 대통합은 성공하기 힘든 프로젝트다.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이기기 위한 물리적 대통합을 추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며 천신만고 끝에 성사시켜도 그 효과가 얼마나 될지 장담하기 힘들다.
외면받게 될 리메이크 정치
지금의 대선 풍경은 마치 리메이크 드라마와 같은 느낌이다. 새로운 모습 없이 과거의 성공을 그리워하며 재탕정치에 몰두하는 비한나라당 진영,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원죄에서 몸을 빼지 못하는 한나라당의 대선주자들을 보면서 좌절하며 지쳐가는 이들은 바로 국민들이다.
리메이크 프로젝트는 살을 깎는 창조의 노력이라든지, 모든 것을 거는 거대한 모험 없이도 재미를 보자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 대신 리메이크 작품이 흥행에서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이번 대선이 지금 이 모습대로 그냥 이렇게 맥없이 끝나지는 않을 것으로 믿는다. 희망에 목말라하는 국민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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