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같은, 30만 휴일 인파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날에 아침부터 KTX를 타고 일하러 가는 사람의 마음은 꽤나 심란하기 그지없다. 열차 안에 웬 젊은 연인들은 그리 많은지. 늙다리 홀로 좌석에는 썰렁함만이 가득하다. 게다가 부산까지의 3시간 가까운 거리 동안 뒤적인 책이 닉 혼비의 신간 <딱 90일 동안 더 살아볼까>였다. 도무지 살아갈 희망이나 이유가 전혀 없는 네 남녀가 자살할 요량으로 특정 건물의 옥상에 올라갔다가 만나, 이런저런 좌충우돌의 에피소드를 만들어 낸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닉 혼비의 다른 작품마냥) 꽤나 유머러스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웃음이란 달지 않고 쓰디 쓴 자조의 미소일 뿐이다. 거 참, 인생이라고 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게 여기서나 영국에서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들 좋아라, 하루 여행을 다닌다 한들 그것 역시 평소의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간힘의 다른 표정일 것이다, 라고 하면 너나 잘하세요 하는 소리를 듣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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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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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휴일에도 일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 있는 것이다. 괜히 혼자서 센티멘털해질 필요가 없는 일이다. 후배는 한참 <황진이> 관련 기사를 쓰는 모양이었다. "<황진이> 어땠어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는데?" "어떤 점에서요?" 얘기가 이렇게 이어지는 걸 보니 이 친구는 <황진이>가 별로인 모양이다. "관습적이고 진부한 러브스토리여서." "근데 좋아요?" "역설적으로 그래서 좋았어." "거 참 이상하시네. 왜요?" "대중적이고 쉬웠으니까. 요즘 같은 시즌엔 친숙한 영화들을 보고 싶어하는 거 아닌가?" "근데 몇몇 사람들 반응은 안 좋아요."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황진이>는 100억 가까운 돈을 들인 영화고 그렇다면 예술 하는 영화 만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어. 영화가 어려우면 300만 이상 관객을 모을 수 있겠어? 이거 안 되면 가뜩이나 힘든데 한국영화판 더 어려워진다고." "(별 걱정 다 하시네. 당신이나 잘하세요) 하여튼 특이하시네. 나중에 소주나 사주세요."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은, 어쨌든 당신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선배니까 예의만큼은 갖추겠다는 인사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말이 그렇게 틀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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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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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시사회 직후 만난 한 친구도 나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당신, 언제부턴가 지나치게 생산자 입장에서만 영화를 보는 것 같아." 아 근데, 그런 얘기까지 들으면 난 정말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 역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윤현이라는 점에서만큼은 약간의 불만이 있다. 장윤현이라면 충무로에서 꽤나 똑똑하고, 말 잘하며, 앞을 내다 볼 줄 알고, 낡은 것보다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눈물로 뒤범벅되는 신파 러브스토리를 찍었다는 것에는 못내 아쉬움이 앞선다. 그는 더 새로운 '황진이'를 만들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일같이 피곤하고 누추한 일상에 시달리는, 초파일이 샌드위치 데이라며 얼씨구 야외로 나가기를 원하는 '노멀한' 사람들에게 영화적으로 늘 '새롭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게 다가갈 것인 가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장윤현 감독 역시 샌드위치 데이고 나발이고 편집실에 앉아 개봉일 직전까지 영화를 다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거 참, 산다는 건 참으로 팍팍한 일이다. 영화로 먹고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저 <황진이>가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 279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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