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과 비극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들이 오히려 '스펙터클'로서 소비되는 경향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잔혹한 전쟁 혹은 기아의 참상을 사진으로 찍거나 비디오에 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 잔혹한 참상을 고발하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사진 혹은 동영상을 보는 사람 역시 그 고통과 참상에 진저리를 치며 사진 속 주인공들을 동정하고 연민하며, 그 비극에 대해 자신이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착각)한다. 그러나 실상 사진 한 장, 짧은 뉴스클립 한 편이 그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진실을 제대로 전달해 주지는 못하며, 그걸 보는 것으로 그곳의 비극을 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진이나 동영상들은 지금처럼 전세계가 사건 즉시 CNN 뉴스를 통해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는 세상에서는 오히려 타인의 고통이 일종의 스펙터클의 쾌감을 위한 전시물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의 고통을 드러내는 영화에서는 영화의 완성도를 논하기 이전, 윤리의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이러한 장르들에서 우리가 소위 '예술성 있다'고 평가하는 영화들은 놀랍게도 정말 영화의 완성도보다는 영화가 가진 윤리적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
|
밀양 ⓒ프레시안무비 |
느닷없이 수전 손택의 논의로 이 글을 시작하는 것은, <밀양>이 묘사하는 신애(전도연)의 고통과 절망이 감독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든 이런 식의 '고통의 전시물'로서 너무나 강력하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이창동 감독이 묘사하는 인물이 처하게 되는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인물들이 겪는 절망과 상처는 언제나 관객들을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이창동의 영화를 '리얼리즘의 정수'라 부르며 상찬을 바치고, 새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이 얼마나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차있는지, 그리고 우리 주변에 이렇듯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탄식한다. 하지만 이러한 탄식은 언제나 찰나의 것이다. '서사'라는 것의 구조는 언제나 찰나를 영원으로, 다시 영속성을 찰나의 것으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극단의 고통과 상처를 제시하며 음악도 논평도 최소화하는 방식은 외면적으로는 더없이 '절제'하는 듯 보이지만, 이창동의 영화들은 실은 지나간 시절의 신파를 한껏 극단화하며 관객을 '협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창동 영화에 대해 (부정적 의미에서) '문학적'이라 느끼는 것은 그의 영화가 정말로 영화적이지 않은, 문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특히 60,70년대 한국문학에서 풍미된 특정한 (신파의) 정서가 영화마다 반복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신파 정서는 (고통 당하는 자의) 고통을 전시하고 자해를 강화하며, 타인에게 이를 지켜보도록 강요하며 죄책감을 강제하는 특유의 새도-매저키즘에 기반을 두고있다.
| |
|
밀양 ⓒ프레시안무비 |
|
이게 과연 리얼리즘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포르노를 리얼리즘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밀양>은 '고통'이라는 측면에서 지극히 포르노적인 영화다. 구원과 용서에 관한 영화라고? 아니, 궁극적으로 <밀양>은 용서할 수도 없었고 구원받지도 못했기에 여전히 고통스러운 한 인간의 상처를 불특정 다수의 눈앞에 한껏 전시하고 들이대며 죄책감과 자책의 매저키즘을 강요하는 '나쁜' 영화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