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스와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미국의 슈퍼히어로들은 '인위적으로 구성된 근대국가'인 미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전설과 영웅담을 인공적으로 제공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소산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나 구전되어 오는 영웅신화와 전설 및 민담들이 있는데, 이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라고 자식세대에게 물려주는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문화 기제이다. 그러나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국민 전체가 공유하고 이들을 결속시킬 자연발생적인 / 구전의 전설이나 신화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근대국가인 미국에서는 이 역할을 대중문화가 담당하게 되는데, 서부 개척시대의 총잡이들과 악당들을 주인공으로 한 싸구려 대중소설, 초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들을 등장시킨 코믹스, 그리고 이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바로 미국의 새로운 '전설'과 '영웅신화'를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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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3 : 왕의 귀환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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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영웅신화를 비롯해 이와 비슷한 줄거리를 갖는 많은 옛이야기들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분석에 의하면 한 사회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확인시키고 전수시키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상징하는 이야기이며(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융파의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이드와 에고, 수퍼에고를 조화롭게 발달시켜 한 사람의 '성인'이 되는 과정을 비유하는 이야기이다(브루노 베델하임, [옛 이야기의 매력]).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들은 필연적으로 성장담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일정한 '공식'을 갖고 있는 게 당연하다. 평범한 한 인간이 선택되어 소명을 받고, 현명한 인도자의 도움 하에 모험을 떠나며, 우여곡절 끝에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무사히 성공하고 고향으로 귀환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겪게 되는 모험은 정신적인 성숙의 단계를 비유하며, 이들이 중간에 겪는 시행착오와 실패는 소명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과 미성숙의 결과이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나 우리나라의 바리데기, 그리고 동화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소년소녀들이 겪는 모험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J.R.R.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쓴 이유가 "이렇다할 신화를 갖고있지 못한 앵글로 색슨족에게 신화를 선사해 주고 싶었다"는 소망 때문이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요정족도 전사도 아닌 프로도가 겪는 여정의 의미가 조금 더 의미있게 다가온다. 이러한 모험담들은 이야기 버전마다 조금씩 변형과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절대로 빠지지 않는 공통적인 단계가 바로 조셉 캠벨이 '요나의 뱃속'이라 불렀던 단계와 '살부(殺父) 의식'의 단계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3일간 있다가 나온 뒤 자신의 소명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처럼, '요나의 뱃속' 단계는 '옛 존재의 죽음과 새로운 존재로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모든 영웅담에서 동굴이 됐든 좁은 계곡이 됐든, 어둡고 축축하고 좁은 장소에 빠진 주인공이 고생 끝에 이곳을 벗어나게 되는데, 이 설정은 모두 죽음과 재탄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도 골룸의 꾀에 빠져 거미의 동굴로 접어들어 유사-죽음을 맛보며, <스타워즈>의 주인공들은 사방이 좁혀지는 쓰레기장에 빠진다. 스파이더맨이 심비오트에 감염돼 블랙슈트를 입었다가 찢고 나오는 것 역시 이의 변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영웅들이 처치하게 되는 괴물은 한 시대의 '아버지 세대', 즉 기성세대를 뜻한다. 새로운 세대는 기성세대에게 '승인'을 받고, 그를 극복하고 넘어섬으로써 비로소 한 사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모든 '아들들'은 장래 '아버지'의 모습을 갖고 있고, 모든 아버지들은 또 누군가의 아들이기도 하다. 결국 영웅들이 죽이는 괴물들은 사회적으로는 기성세대이자, 내적으로는 자기자신의 약하고 일그러진 면을 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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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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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중문화에서의 슈퍼히어로들은 사회가 공동체적 무의식을 갖고 구전된 이야기가 아닌 한 사람(혹은 여럿)의 창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의 주인공인만큼, 이러한 전통적인 영웅이야기의 바탕에 현대적인 변용이 좀더 많이 가해진다 할 수 있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오리지널 3부작은 역으로 조지 캠벨이 정리한 "영웅신화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를 다시 이야기로 구성하면서 우주 활극이 되었다. 특히 미국의 슈퍼히어로들은 평범한 인간과 가면을 쓴 초능력자의 모습을 오가며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데에 골몰하는 특징이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수퍼맨은 애초에 외계에서 온 존재이며 배트맨은 전통적인 영웅신화가 당연하게 전제하는 '선의 추구'보다는 복수에 좀더 집착하는 등 전통적인 영웅신화와는 오히려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전통적인 영웅신화에 다름 아닌 이야기 구조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내적으로 성장담일 수밖에 없는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를 외면적으로도 완전히 성장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아버지처럼 자신을 키워준(그러나 결코 아버지가 될 수는 없었던) 삼촌 벤을 잃은 피터 파커가 1편에서는 닥터 오스본(이자 고블린)과, 2편에서는 옥타비아누스과 대적하게 된다. 이것은 피터가 자신의 멘토이자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유사-아버지를 얼마나 간절히 찾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이 아버지들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고, 아버지들이 악하게 변했을 때, 아들은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세대로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3편에서 피터가 상대해야 할 악당들은 이제 더이상 그의 '아버지뻘'도 아니고, 나이상으로는 아버지뻘이라 해도 (결코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는) 도둑잡범에 불과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대면해야 하며, 자신의 몸을 지나간(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능력을 갖고 있는) 자신의 얼터-에고를 상대해야 한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매우 현대적인 외피를 갖추고 있지만, 실은 그 어느 슈퍼히어로보다도 전통적인 영웅신화의 서사 구조에 충실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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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3 ⓒ프레시안무비 |
보다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일수록 성장담이 반복적으로 절실해지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나이를 먹는다 해도 변화하는 세계에 손쉽게 적응하고 익숙해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를 정신과 윤리의 변화 속도가 따라잡지 못하는 이 시대에, 전통적인 영웅신화 구조를 담은 이런 슈퍼히어로물이 어린아이나 청소년들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그토록 절절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인 역할을 현재 전세계적으로 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한 사회의 광범위한 층이 열렬히 열광할 수 있는 블록버스터이다. 샘 레이미 감독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화려한 볼거리 이면에 정확히 어떤 이야기와 사회적 의무를 담아야 하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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