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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풍자소설가 커트 보네거트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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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풍자소설가 커트 보네거트를 기리며

[북앤시네마] 향년 84세, 총 14권의 책 남겨

마크 트웨인 이후 미국의 가장 뛰어난 블랙유머 및 풍자 소설가로 꼽혔던 커트 보네거트가 4월 11일 밤 맨하탄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향년 84세. 뉴욕타임즈의 보도에 의하면 작가이자 사진가인 그의 아내 질 크레멘츠의 말을 빌어 "몇 주 전 낙상한 뒤 회복 불가능한 뇌손상으로 병원에 입원중이었다"고 전했다. 우주와 외딴 행성, 외계인이 등장하고 시공간을 한꺼번에 뛰어넘곤 하는 소설 특성상 SF 작가로 분류되곤 했던 그는 날카로운 블랙 유머와 독설을 사용해 전쟁을 반대하고,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제기하며,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주류 문단에서도 인정을 받은 이 시대 가장 위대한 미국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베트남 전쟁 반대와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었던 6, 70년대, 보네거트의 책은 당시 청년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었던 인기 작가였다. 지금이야 미국의 거의 전역의 초, 중, 고등학교가 수업시간에 그의 소설을 다루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보수적인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의 책이 금서로 분류되기도 했다. 때로는 외계인의 눈으로, 때로는 백만 년 전에 죽은 영혼의 눈으로 인간의 우스꽝스럽고도 한심한 작태를 비꼬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감추지 않으며 인간의 선의를 마지막 희망으로 붙잡는다. 국내에서는 일명 '포스트모던 소설'의 선구자라는 다소 괴상한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소설이 외계의 행성과 지구를 왔다갔다 하고 시간적으로도 비선형 구조를 취하며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렬한 웃음 속에서도 그가 일관되게 다루는 주제인 '전쟁의 참상'은 일견 황당하고 우스운 줄거리 속에서도 서늘한 깨달음과 깊은 슬픔을 안겨주곤 한다. 이것은 그가 직접 겪었던 드레스덴 폭격 사건에서 연유한다.
커트 보네거트 ⓒ프레시안무비
대학을 다니던 중 자원 입대하여 유럽에 배치된 그는 얼마 안 가 독일군에게 붙잡힌 뒤 전쟁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근처 수용소에서 강제 노력을 하게 된다. 드레스덴 폭격 때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독일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던 드레스덴이 폭격 때 죽은 수천 명의 민간인들의 시체로 뒤덮인 폐허가 된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연합군에게 구출되어 드레스덴을 가득 채운 시체 치우는 일을 했던 그와 동료는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평생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후 열렬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무려 23년간 구상하다가 마침내 1969년에 펴낸 [제5도살장](원제는 '제5도살장,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Slaughterhouse-Five, Or the Children's Crusade'이다.)에 빌리 필그램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답게 그의 작품은 희곡과 장편, 단편을 막론하고 무수히 영화로 옮겨졌지만, 가장 유명한 작품은 <내일을 향해 쏴라>와 <스팅>의 조지 로이 힐 감독이 1972년에 영화로 옮긴 <제5도살장>, 그리고 <양들의 침묵>의 조나단 드미 감독이 1982년에 그의 단편을 TV용 영화로 옮긴 <이번엔 내가 누구지?(Who Am I This Time?)>이다. 이 밖에도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을 맡고 앨런 루돌프 감독이 연출한 <브루스 윌리스의 챔피언(Breakfast of Champions)>(원제 :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나, 배우 출신 감독인 키스 고든이 연출하고 닉 놀테, 알란 아킨, 커스틴 던스트 등이 출연한 <내 영혼의 밤(Mother Night)> 역시 커트 보네거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국내에서 커트 보네거트는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한 출판사 사장의 직접 번역을 통해 거의 전 작품이 소개된 적이 있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절판돼 버렸다. ('새와물고기'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던 이 번역판은 다른 커트 보네거트 팬들에게 '보네거트 문체를 매우 잘 살린 훌륭한 번역'으로 칭송 받았으나 현재는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희귀품목이 되어 버렸다.) 이후 그의 작품들이 조금씩 지명도를 획득하면서 다양한 출판사에서 간혹 번역이 시도되곤 했으나 역시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아이필드라는 출판사에서 [갈라파고스]와 [고양이 요람], [제5도살장], 그리고 보네거트의 마지막 작품인 [타임퀘이크]가 거의 1년에 한 권꼴로 출판되었다. 현재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책도 이 네 권이 전부이다.
(왼쪽부터) [고양이 요람], [갈라파고스], [제5도살장], [타임퀘이크] ⓒ프레시안무비
커트 보네거트는 뉴욕타임즈가 그의 책 [타임퀘이크]를 평하며 썼던 표현 그대로 '웃고 있는 파멸의 예언자'였다. 또한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일 무렵 특유의 신랄한 어투로 부시 대통령을 비판하며 노구를 이끌고 반전 집회에 참석하며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준 실천적인 지식인이기도 했다. 날카롭고 독기 어린 풍자와 독설의 웃음 속에서도 인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놓지 않았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던 커트 보네거트가, 이제는 트랄파마도어(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외계 행성)에서 모쪼록 편안히 쉴 수 있기를. 아울러 그의 다른 작품들 역시 하루빨리 국내에 소개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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