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무엇이 '경쟁력 있는 농업'일까? 아직 불분명하다. 그래서 시간을 뒤로 돌리고, 시선을 잠시 옮겼다. 과거 인도에서도 비슷한 구호가 나온 적이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개발도상국 사이에서 산업농업이 확산되면서, '고수확품종' 씨앗, 집약적 관개 및 화학비료와 농약이 널리 보급됐다. 이와 함께 생산량도 급증했다. 소위 '녹색혁명'이다.
물론 한미 FTA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가 이야기하는 농업 경쟁력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나온 움직임이다. 그러나 큰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대농(大農)이 중심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보다 경제 논리를 앞세웠다는 점에서 닮았다.
식량우선연구소(Food First - Institute for food and development policy)가 올해 1월 발표한 보고서(원문 보기)를 소개한다. 과거 '녹색혁명'의 진원지로 꼽혔던 인도 펀자브 주가 지금 처한 상황을 분석한 내용이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농가부채로 자살한 인도 농민의 수가 10만 명에 이른다는 것, 그리고 빚에 찌든 주민들이 마을 자체를 송두리째 경매에 내놓은 경우가 펀자브 주에만 5곳에 달한다는 것 등이다.
생태적인 문제는 더 심각하다.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펌프 우물'에서는 소금물이 솟아나 토지를 황폐화 시켰다. 또 살충제와 화학비료의 과도한 사용, 고수확 품종만을 집중적으로 재바하는 단작(單作) 체계 등은 토질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 과거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던 '녹색혁명'이 가져온 장기적 효과였다.
'가혹한 수확 : 인도 펀자브 녹색혁명에서 예상치 못한 사회, 환경, 경제적 충격과 농민 자살' (BITTER HARVEST: Farmer suicide and the unforeseen social, environmental and economic impacts of the Green Revolution in Punjab, India)이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를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범용 씨와 유해정 씨가 요약 번역했다. 그 내용을 일부 보완하여 소개한다. <편집자>
인도에서 중산층 증가, 그리고 IT 산업의 성장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성장에 가리워진 그늘도 만만치 않다. 인도의 시골을 휩쓸고 있는 빚에 의한 자살 사태가 대표적이다. 1993년부터 2003년 사이, 10만명에 가까운 인도 농민들이 빚을 지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거두었다. 그래서 인도의 어떤 주에서는 농민 자살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펀자브 주가 이런 법률을 제정한 첫번째 주라는 사실은 펀자브에 대한 지식과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충격이다.
1960년대 말, 인도가 기근과 농촌 혼란의 가장자리에서 동요하고 있을 때, 펀자브는 그 나라 역사에서 대규모 농업 실험을 하기 위한 중심지로 발탁됐다. 이 실험은 신생 독립국에게 식량 생산을 급격하게 증가시키기 위해 고안되어, '녹색혁명'으로 알려지게 됐다.
녹색혁명의 끝까지, 펀자브는 인도의 빈 곡물창고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다른 농촌 지방을 훨씬 능가하면서 근대적 수준 및 경제적 번성을 성취했다.
그러나 펀자브에 녹색혁명 기술을 도입하여 인도의 나머지 지방을 위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려는 본래의 임무에 성공한 반면, 녹색혁명의 애초 설계자들이 예상치 못했던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재앙도 나타났다.
펀자브의 농업 위기는 서로 분리된, 그러나 밀접하게 상호 연관된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 시장 축소, 정부보조금의 정체 및 생산비용의 증가로 인한 부채 △ 녹색혁명의 배제 정책과 사회적 불평등 △ 경지와 관개 체계 모두에서의 생태적 붕괴 등이 그것이다.
인도 펀자브 농업의 '역사'
대륙을 파괴한 기근, 역사를 되돌아볼 때 아마 이보다 더 비참한 기억을 없을 것이다. 굶주린 인도 대중들에게 각인된 기근의 이미지는 지난 1950년대와 1960년대 인도 농업의 산업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한 강력한 촉매제였다.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14번의 유명한 기근이 인도를 강타했다. 하지만 이런 기근들은 거의 모두 그 범위와 규모에서 완전히 지역적인 것이었다.
농업역사학자 바티아의 주장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형태의 기근, 즉 광범한 지역에 걸쳐 넓게 퍼진 식량과 곡물의 일반적인 부족은 1860년 이후 영국 식민지배의 도래와 함께 인도에서 시작됐다.
그 후 19세기의 나머지 반세기 동안에만 인도는 최대 25번의 거대한 기근으로 고통을 받았다.
독립 초기 및 녹색혁명
'녹색혁명'이 정부에 의해 인도 내의 농업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채택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더 일찍 고안된 전략들도 있었다.
상당수 전략들은 독립정부 시절 네루가 농업 분야에서 국가 재건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는 농업 개혁과 토지재분배, 마을 간 협동 등을 목표로 다양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네루의 토지개혁은 천천히 실행에 옮겨졌고, 그 계획을 전개하기 위한 노력은 그가 속했던 의회에서 산업주의자들과 복지반대주의자들에 의해 몇 번이나 한계에 부딪쳤다. 결국 1964년 네루가 사망함으로써 재분배를 통한 인도의 토지개혁은 모두 폐기됐다.
1960년대 미국은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인도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할 것이라 예상했다. 왜냐하면 이웃 국가의 소작농만큼이나 광범위한 인도의 소작 인구가 배고프고, 환멸을 느끼며,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인도'에 대한 끔찍한 전망이 워싱턴으로 하여금 인도의 식량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한 전략을 채택하게 했다. 농업의 산업화를 골자로 한 '녹색혁명'이 그것다.
인도의 오늘
1951년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도입된 공공분배제도는 인도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보존돼 왔다. 사실 그것은 '정의로운 성장' 정책의 중요한 요소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서 이런 제도는 어쩔 수 없이 도시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모든 교외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공공분배제도는 1960년 초반에 '성장'에만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공공분배제도는 단지 기근에 대항해 그것을 멈추게 하는 의미로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공공분배제도를 통해 유통되는 농산물의 양은 현재 국가 내 농업 거래량의 1/3에 달한다. 그리고 인도 인구 8000만 명에게 규칙적인 식량보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인도 중앙정부는 이를 줄여가고 있다.
펀자브와 공공분배제도
펀자브에서도 역시 인도의 경제적 보호무역주의는 필요한 때 적절한 가격으로 식량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보호무역주의는 거대한 인구에도 불구하고 고립되어 있는 농민 공동체를 세계가격의 급속한 상승과 하락으로부터 지켜냈다.
1991년 인도정부가 농업보조정책에 큰 변화를 꾀하고, 세계은행이 요구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보호무역주의는 중단됐다. 이런 변화는 공공 영역의 해체를 가져오는 것과 함께 민간 영역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의 기간 동안 정부는 펀자브에서 공적인으로 배분되는 식량을 20% 이상 줄였다. 기근 또는 기근에 가까운 상황이 종종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 다른 7개 주의 조건도 이와 같았다.
펀자브에서의 채무 증가
2000년 수확기 끝 무렵, 정부보조가 점점 축소되면서 공공분배제도의 밀과 쌀을 구입할 수 없게 되면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인도 전역에 걸쳐 굶주리게 된 반면, 펀자브의 곡물 창고는 팔리지 않은 쌀로 넘치고 있었다.
펀자브 농민이 자신의 곡물을 판매할 시장을 구할 수 있을 때조차, 가격은 종종 너무 낮았다. 농업 생산에 소요된 비용을 상쇄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중소농을 산업농업에서 밀려나게 했던 높은 생산비용은 이제 대농조차 압박하고 있다.
2006년 현재, 펀자브 주 말씽왈라 마을은 최대 5000만 루피까지 은행에 빚지고 있고, 또 다른 2500만 루피를 사설 대부업자 및 대행기관에 빚지고 있다.
"우리의 부채는 목까지 차오른다. 우리는 우리 땅을 파는 것 외엔 남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라고 마을회의 의장 자르비르 씽이 말한다.
곡물 생산이 주춤하면서, 해결 안된 부채를 갚을 어떠한 희망도 없이, 이 마을은 1800에이커가 넘는 마을의 자산을 싸게 팔아치우기로 결정했다.
이는 결코 고립된 사례가 아니다. 2001년부터 펀자브에서 서로 다른 5개의 마을이 스스로를 경매에 부쳤다. 이런 현상이 인도 역사에서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도의 마을을 시장에 송두리째 내다놓은 경우은 과거 한번도 없었다.
펀자브의 유산자와 무산자: 녹색혁명과 사회적 불평등
농업을 산업화하는 '녹색혁명'에 대한 비판자들에 따르면, 녹색혁명의 전략은 더욱 많은 생산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인도의 대다수 소농들을 배제했다.
녹색혁명 전략을 실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농민은 산업적 경작에 필요한 값비싼 투입물을 간단히 구매할 수 있는 충분한 자본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소농들은 녹색혁명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고정 및 유동 자본에 접근할 수 없다. 이런 형태에서 빚어진 경제적 차별은 오늘날 펀자브 농촌에서 보이는 불평등한 부채 분포의 초석을 깔았다.
녹색혁명이 1960년대 및 1970년대를 관통하면서, 펀자브 전역의 땅은 보다 소수의 대규모 농장의 보유지로 집중됐다.
불모지와 소규모 농민들은 녹색혁명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과중한 채무로 인해 자신의 땅을 대규모 경작자에게 팔거나 저당 잡혔으며, 이는 결국 1970년과 1996년 사이에 펀자브 경작지의 20% 이상이 감소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불모지 및 소규모 농민의 보유지는 같은 기간 거의 40%가 감소했고, 반면 대규모 및 초대형 농장은 50% 이상 증가했다.
점점 대형화되는 펀자브 농장의 변화는 소규모 불모지 농민들에게는 '가난화 및 무산계급화라는 이중의 과정'일 뿐, 다른 곳에서의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뜻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펀자브에서 '계약농'이라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관행의 출현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계약농은 밀, 쌀, 면화를 제외한 작물 재배에 집중하기 때문에 펀자브 농민에게는 대안의 길로써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있는 관행이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 현안과 관련되는 한 계약농은 이미 문제가 있는 화염에 더 많은 기름을 붓는 꼴이다.
경지 붕괴
고수확 품종의 단작(單作) 체계는 기본적으로 영양소의 재생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실상 질소를 더 이상 토지로부터 얻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퇴비를 생산하는 동물에게 중요한 사료를 공급하는, 기장과 같은 다른 작물들은 거의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고수확품종 쌀과 밀 작물은 크기가 '작아' 전통 품종보다 훨씬 적은 짚을 제공하고, 이는 그후 피복과 사료를 위해 이용 가능한 바이오 매스의 지속적인 감소를 이끈다. 이 체계가 한번 정착되면, 종합 비료와 살충제의 사용 증가와 더불어 토질의 저하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새로운 쌀과 밀의 씨앗이 극도로 제한된 유전적 기반에서 만들어졌고, 그 후 펀자브 전역의 약해진 경지에 한꺼번에 심어졌기 때문에 고수확품종 재배자들에게는 새롭고 예기치 못한, 그리고 게걸스런 해충과 질병이 주요한 문제가 됐다. 펀자브 농민의 말을 들어보자.
"1990년 이전에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잘 벌었고,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나 해충이 등장한 이후 우리는 지옥을 보았다.
우리는 그 해 내내 때로는 35번이나 약제를 살포해야 했다. 살충제 가격이 매우 비싸서 우리는 빚을 져야만 했다."
대부와 부채 현안을 떠나서 펀자브의 살충제 사용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심각한 건강 현안이 발생했다. 살충제 오염 문제는 특히 식수와 관련해 심각하다. 계속되는 펀자브 경지의 질 저하 그리고 그에 따른 의료비용은 '부채'와 직접 관련된다.
관개의 문제
펀자브가 상대적으로 건조한 반건조 기후라는 점은 녹색혁명의 설계 과정에서 놓친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는 중요한 지점인데, 왜냐하면 쌀은 매우 '목말라 하는' 작물이기 때문이다.
쌀은 자라는 데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쌀이 펀자브에서 '전통 작물'로 고려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게다.
새로운 관개 체계는 펀자브의 기존 생태계 바깥쪽에서 작동하도록 고안됐다. 기존 수로가 오직 강수만으로 지금까지 제공해 왔던 것과 비교하여 녹색혁명 씨앗과 기술은 더욱 많은 관개를 필요로 했다.
관개 증가 요구의 대부분은 우물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충족시켰다. 이들 우물의 많은 경우는 '펌프우물'관의 설치를 통해 이용이 가능했다. 그 관은 대지 깊숙이 구멍을 뚫고서 다른 방법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지하 대수층으로부터 물을 뿜어 올렸다.
오늘날 백만 개 이상의 펌프우물이 펀자브 전역에 산개하여 거의 75%의 관개를 책임진다. '펌프우물 백만 개'로 상징되는 복합적인 힘이 녹색혁명을 향해 돌진하는 동안 펀자브의 열악한 생태 체계는 더욱 황폐해졌다.
펀자브 농민은 직면한 과도한 비용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강력한 전기모터를 사용하여 물을 끌어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펀자브 소농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1998년 현재 펀자브에서 43만 에이커가 넘는 농경지가 물에 잠겼다. 백만 개 이상의 펌프우물이 생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들어간 비용이 현재 1000만 루피아(인도 지역의 화폐 단위. 1루피아는 약 22원)에 달한다.
최종적으로, 물에 흠뻑 잠긴 펀자브의 농경지는 '소금 오염', 즉 지하에 있는 소금이 상승하는 지하수면을 따라 지층토까지 침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물에 흠뻑 잠기는 것보다 경지의 '소금화'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땅이 작물을 효과적으로 키우는 능력을 거의 영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과 발전
농민의 자살이라는 현안은 현재 펀자브의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와 결코 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들의 죽음은 펀자브 농업의 과거와 현재 산업화되어 가고 있는 방식에 대한 이의 제기이자 자유시장 주의이라는 학문적 이념에 대한 도전이며, 궁극적으로는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녹색혁명은 인도를 먹여 살리는 것이 단지 '기술적 문제'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식량 문제는 단지 '근대'를 향해 인도의 기술 진보가 넘어야 할 하나의 장애물로서만 취급됐다. 그리고 이런 근대는 위대한 성공에 대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립적인 신호를 뜻한다.
따라서 인도 농업 문제의 해결은 문화나 역사와 무관한 기술과 자본의 문제로만 접근했다. 다른 무엇보다 기술적 해결만을 촉진하다보니, 녹색혁명의 설계자들은 단지 가장 비옥한 지방에서 가장 많은 자산을 가진 농민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을 정당화할 수 밖에 없었다.
생산 제일주의에 대해 도전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생태적 질문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경제적 질문도 제기된다. 즉자적인 질문 하나는, 만약 자신이 의존하는 재화를 파괴한다면 그 프로그램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기술될 수 있는지 여부다.
농업의 경우, 경지와 관개는 여전히 농업경제의 성장을 제약하는 요소이다. 그래서 시장경제에서 기술 관료의 작업이 "자연 세계의 결함을 기술로 메울 수 있다"는 가정에 따른 산업농업을 향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결함'은 단지 경제와 기술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작동하는 자체적인 한계다.
그리고 이런 한계들이 충분히 긴 시간 동안 서로 교차하면 작용할 때, 생산량 감소와 농가 부채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녹색혁명이 궁극적으로 성공할지 혹은 실패할지에 대한 질문은 펀자브 농업의 향후 진로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국제쌀연구소와 세계은행처럼, 초기 펀자브에서 밀-쌀 녹색혁명을 똑같이 장려했던 단체들이 현재의 양상에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색혁명을 역사적인 성공,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기본적 청사진으로 남겨두는 태도는 여전하다. 녹색혁명의 일반적 방법론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어렵다.
'성공' 선언은 아예 사람들의 귀를 먹게 만들어서 사방에서 녹색혁명을 둘러싼 수많은 비판의 목소리를 거의 침묵시켰다.
'녹색혁명'은 '성공'했는가? 최소한 아직까지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것은 죽은 농민들의 무덤이 전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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