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뻔할 것 같아 선택하게 되지 않는 로맨틱코미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같은 영화는 일단 보게 되면 예상대로 너무 뻔하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깔깔대며 보게 되는 작품이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이상한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흔하디 흔한 영화를 그럴듯하고 재미있게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건 이야기의 이음새가 좋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80년대에 가장 잘나가던, 2인조 보이밴드 멤버였던 주인공 알렉스(휴 그랜트)는 이제 1987년 졸업생 동창회 파티에서나 노래를 부르는 신세다. 벌어놨던 돈도 거의 까먹은 그는 심지어 놀이동산 무대에까지 서야 생활비를 벌 수 있다. 어느 날 그 놀이동산 공연에서 앵콜을 부르라는, 그게 계약조건이었다는 매니저의 말에 알렉스는 '쪽팔리다(embarrassed me)'며 무대에 오르지 않으려 한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소피(드류 배리모어)는 그러지 말라며, 당신의 노래는 훌륭하다며, 자신의 노래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그녀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알렉스는 앵콜곡으로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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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프레시안무비 |
"오랜 세월을 뭐가 옳고 그른지 모르고 살았어요 / 직장도 없고 / 때론 주저앉아 울어버리죠 / 앞으로의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 오늘밤 나와 함께 춤을 춰요 / 태양이 지면 / 내 가슴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요 / 신발을 신고 / 이곳으로 와 나와 함께 블루스를 들어요 / 앞으로의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 나와 함께 춤을 추어요 / 난 당신을, 당신은 날 바라보아요 / 당신도 보이나요 / 실패한 두 인생이 하나가 되었어요 / 우리 이 시간을 즐겨요 나와 함께 춤을 추어요" 그렇고 그런 두 남녀의 좌충우돌 사랑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은 잘 들여다 보면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단순한 사랑얘기보다는 위의 노래 가사처럼 80년대를 20대로 살았던 세대가 자신의 실패한 인생을 뒤돌아 보는 절절한 사연이 더 많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젠 '직장(할 일)도 없고' 그래서 '주저앉아 울어버리는(좌절한)' 세대의 통한의 고백이 느껴지는 것이다. 놀이동산에서처럼 이제는 아무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불러야 하는 세대. 거기엔 뼈아픈 자책과 회한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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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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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귀엽고 예쁜 것은 주인공 알렉스처럼 40대의 남성과 여주인공 소피와 같은 20대 여성이 진정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여자대로, 20대다운 사랑과 인생의 상처를 지니고 있으며 두 사람은 그 상처를 통해 세대간의 벽을 허물고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아니, 두 사람 사이엔 아예 세월의 차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하는 건 결국 나이 차이나, 세대 차이 혹은 생각의 차이나, 계층계급의 차이가 중요치 않다는 것을 은근슬쩍 보여주는 대목인데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가 지금의 시대적 문제를 이겨 나갈 수 있는 중요한 모멘트일지도 모를 일이다. 차이를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진정으로 소통하는 것! 한낱 로맨틱코미디에 불과한 영화를 지나치게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들의 몫이자 자유의지다. 흘러간 80년대 팝스타 알렉스 역을 연기한 휴 그랜트의 실제 인생이 극중 캐릭터을 닮아가고 있다는 느낌도 새롭게 다가 선다. 1960년생인 휴 그랜트는 한때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연기의 대명사급으로 대우받았지만 이제는 조금씩 '한때의' 배우로 취급받고 있다. 배우의 정체성이 극중 인물의 그것과 딱 맞아 떨어질 때 영화는 진정성을 얻는다. 스스로 왕년의 스타 연기를 맡은 휴 그랜트의 속마음은 때론 속상하고 그래서 측은해 보이지만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고맙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인생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실패한 인생일 수 있다. 그러나 노래가사처럼 지금 이 순간 춤을 추고 싶은 건 그때문이다. (* 이 기사는 문화일보 3월6일자 '오동진의 동시상영관'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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