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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의사당' 천도교 중앙총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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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간 의사당' 천도교 중앙총부 일대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北村일대 역사공간③

운현궁에서 나와 낙원상가 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왼편으로 교동(校洞)초등학교가 나온다. 1894년 9월 18일 왕실 자제들에게 신교육을 시키기 위한 왕실학교로 설립되어, 1895년 7월 23일 한성사범학교와 부속소학교 규칙이 공포되면서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로 개편된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요람이다.

계동소학교(지금의 재동초등학교)를 비롯해 제1세대 관립 초등학교들이 모두 ‘소학교령’이 공포된 1895년 7월 이후에 설립된 학교들이니까, 교동초등학교는 그보다 1년 앞서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맏형 자리를 차지하게 된 셈이다.

<사진21>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요람 교동초등학교

교동초등학교에서 다시 길을 건너면 앞으로 바로크풍의 탑지붕을 한 붉은 벽돌건물 하나가 고풍스런 자태를 드러낸다. 바로 우리나라 천도교의 총본산인 천도교 중앙대교당(天道敎中央大敎堂)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 가운데 어디 안 그런 곳이 드물지만, 특히 조선시기 이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모여살던 북촌 일대만큼 마치 양파껍질 벗기듯 시대의 변화에 상응해서 각각의 역사적 속살을 드러내는 곳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천도교 중앙총부 일대 또한 그러한 곳이다.

<사진22> 천도교 중앙총부 전경

***갑신정변의 현장, 일본공사관 터와 박영효의 집**

먼저 갑신정변 때로 거슬러 올라가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일본공사관의 흔적을 발견한다. 당초 일본공사관이 있었던 곳은 서대문밖 천연정(天然亭) 자리(지금의 금화초등학교 교정)였다.

1880년 11월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우리나라에 주재하는 최초의 주차변리공사(駐箚辨理公使) 자격으로 서울에 들어와 상주공관을 요청하자, 근대적 외교관례에 생소하였던 조선정부가 갑론을박 끝에 제공한 장소였다. 그 위치가 서대문밖으로 정해진 것은 서울 도성안에 외국인의 상주공간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천연정의 일본공사관 청수관(淸水館)은 1882년 6월 9일 임오군변 과정에서 한차례 소실되고, 이후 이곳 교동에 새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수운회관 북쪽 통계청 일대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대한제국 말기 헌정연구회와 대한자강회의 이론가 윤효정은 [풍운한말비사](1931)에서 천도교 중앙대교당 자리라고 회고하고 있다.

<사진23> 서대문 밖 천연정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갑신정변 주역들이 거사를 앞두고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 등과 일본측의 재정ㆍ군사적 지원 문제에 대해 협의를 할 당시 교동의 일본공사관은 신축한 지 얼마 안돼 내부설비조차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아무튼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밤 우정국 개국축하연을 이용하여 거사에 돌입한 정변 주역들은 고종을 모시러 창덕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일본측의 지원을 최종 확인하기 위해 이곳에 들른다. 그리고 10월 19일 예상을 뒤엎은 청국군의 신속한 대응으로 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버린 뒤 이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그 와중에 일본공사관은 다시 불에 타고, 그 뒤 자리잡은 곳이 남산 북쪽 기슭 지금의 서울예전 일대였다. 남산의 일본공사관 자리는 ‘을사보호조약’의 억지 체결 이후 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로 변신을 거듭하며 한국침략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사진24> 남산 왜성대 한국통감부 청사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한편 천도교 중앙총부 서남쪽 담장 너머에는 갑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의 집이 있었다. 박영효가 철종의 부마로 왕족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숙위(宿衛) 명목으로 사람들이 다수 출입하더라도 눈에 띄지 아니하는 편의도 있어,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이 자주 모여 정변을 모의했다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의 관훈동 30번지 경인미술관 자리인데, 당시의 가옥은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져 아쉽게도 그곳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박영효의 집은 조선시기 대표적인 양반 전통가옥으로서 뿐아니라, 갑신정변의 현장으로서 더욱 주목을 받는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장소 따로, 건물 따로가 되어 버렸을 때, 그 건물은 끈 떨어진 연이요, 그 장소는 연 날라가 버린 끈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박제품들로 가득찬 전시공간 보다는 하나라도 역사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역사현장, 문화공간의 보존을 고집한다.

<사진25> 경인미술관으로 변한 박영효 집터
<사진26> 남산골 한옥마을에 이전 복원된 박영효가 사랑채 /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아무튼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박영효의 집은 몰수되어 그 뒤 어떠한 경로를 거쳤는지는 모르나, 일제하에 장안의 최고 갑부로 손꼽히던 민영휘(閔泳徽)의 서자 민대식(閔大植)의 소유가 되었다. 그와 이웃한 서쪽 경운동 64-65번지의 대지 681평도 그의 땅이었으니까, 관훈동 30번지 940평까지 합쳐 1,621평이나 되는 대지가 모두 그의 소유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남쪽 경운동 66번지에는 대지가 1,622평이나 되는 민영휘의 대저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촘촘히 들어선 상가건물들로 그 모습을 찾을 길은 없고, 다만 천도교 중앙총부 남쪽 담장 건너편에 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된 민익두 가만이 홀로 남아 그들 부자의 옛 영화를 말해준다.

<사진27> 전통찻집으로 변한 민익두가

***3ㆍ1운동 이후의 ‘천도교 타운’**

천도교 중앙총부 자리는 3.1운동의 역사현장이기도 하였다. 3.1운동 당시 천도교 중앙총부는 송현동 34번지 지금의 덕성여중 자리에 있었고, 이곳에서는 의암 손병희(孫秉熙)의 주관하에 중앙대교당의 건설공사가 1918년 12월 1일 개기식(開基式)을 갖고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이 3.1운동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그 입구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종일(李鍾一)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출판사 보성사(普成社)의 사장이었던 이종일은 1919년 2월 27일 밤 보성사(현 조계사 서편 경내)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2만여 매를 자신의 집으로 운반해 와 다음날 전국 각지로 배포함으로써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중앙총부 입구의 ‘독립선언서 배부터’라는 표지석은 그래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중앙대교당의 신축을 위해 신도들로부터 모금한 기금의 일부가 3.1운동의 거사자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이 자리는 이래저래 3.1운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사진28> 3ㆍ1운동 전날 전국 각처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배부한 이종일의 집터, 수운회관 간판 아래 길가에 표지석이 보인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26만원의 거금을 들여 1921년 2월 완공을 보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중앙종리원(中央宗理院) 건물도 이때 그 동남편에 함께 세워졌다. 그리고 지금의 수운회관 자리에 1924년 수운 최제우(崔濟愚) 탄신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수운기념관(水雲紀念館)이 들어섬으로써 이 일대는 우뚝 솟은 세 채의 양옥과 교직자들의 사택이 어우러진 ‘천도교 타운’이 되었다.

***천도교 민족운동의 진앙지 중앙종리원 터**

지하철 안국역에서 천도교 중앙총부로 들어서다 보면 그 왼편에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는 기념비와 ‘개벽사 터’라는 기념동판이 정문기둥에 붙어 있는데, 바로 이 자리가 1920-30년대 천도교 계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거점이었던 중앙종리원 건물 터다.

당시 이 건물에는 천도교회의 총본영인 중앙종리원뿐 아니라, 천도교청년회(1923년 9월 천도교청년당으로 개편)ㆍ천도교소년회ㆍ조선농민사 등 천도교 계통 사회단체의 본부와 개벽사를 비롯한 잡지사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러한 연유로 이곳은 손병희의 사위이기도 한 소파 방정환(方定煥)이 김기전 등과 함께 1921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하고, 이듬해 5월 ‘어린이 날’을 제정 공포하면서 닻을 올린 어린이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또한 1920년 6월 천도교청년회에서 창간하여 당대 출판문화운동의 상징이 된 종합잡지 [개벽]이 1921년 3월호부터 이곳에서 발행되고, ‘지상천국의 건설’을 표방한 천도교청년당과 민족주의 진영 최대의 농민운동 조직이었던 조선농민사 역시 이곳에 근거를 둠으로써 중앙종리원 건물은 명실상부한 천도교 민족운동의 진앙지가 되었다.

<사진29> 도로확장 과정에서 사라져 버린 천도교 민족운동의 진앙지 천도교 중앙종리원 터

***중앙대교당과 수운기념관, 조선 민족의 민간 의사당**

동학(東學)을 근대 종교로 재편하여 1905년 12월 출범한 천도교는 전국에 3백만 교세를 자랑했던 일제하 최대의 민족종교이자 민중종교였다. 그 명성에 걸맞게 천도교 중앙총부 서북편에 우뚝 선 중앙대교당 역시 일제하 서울의 3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조선사람의 힘만으로 지은 것중에 가장 큰 건물로서 그 위용을 자랑하였다.

1918년 시공하여 1921년 완공한 중앙대교당은 건평 212평의 화강석 기초에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단층구조로, 전면에 2층 구조의 사무실을 붙여 짓고, 그 중심 현관부분을 바로크풍 탑 지붕으로 높이 쌓아올린 겉모습이 여느 교회당 건물과는 색다른 맛을 풍긴다. 회당 내부에는 중간 기둥을 하나도 두지 않고 천정을 철근 앵글로 엮은 뒤 맞배 지붕을 덮었는데, 아취형의 천정에 장식한 석고 조각들이 아름답다.

손병희는 당초 이 건물을 건평 400평 규모로 지으려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나지 않아 그 절반 규모로 축소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1천명은 빼곡히 들어설 수 있는 넓은 공간이다.

<사진30>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중앙대교당 동편 수운회관 자리에는 수운 최제우 탄신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지은 수운기념관이 있었는데, 상하층 의자에 1천 4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앙대교당과 수운기념관은 본래의 종교적 목적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것은 이곳이 종로 중앙YMCA 회관과 더불어 민간 차원에서 우리 민족의 여론을 대변할 몇 안되는 공회당이었기 때문이다. 얼마전까지 명동성당이 약자들의 작은 소리를 대변하는 열린 마당 구실을 한 것처럼, 1922년 12월 서울 시내의 인력거꾼들이 동맹파업에 돌입하면서 이곳 중앙대교당에서 총회를 열고, 1923년 1월 공식 발족한 조선물산장려회가 설날을 맞아 물산장려 대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일제하 각종 단체의 집회와 강연회가 이들 공간에서 열렸다. 그리고 해방후에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제2차 회의,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 등 굵직굵직한 정치, 사회단체들의 집회가 잇따랐다.

<사진31>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

이렇게 천도교 중앙총부 일대는 갑신정변과 3.1운동의 현장으로, 천도교 계열 민족운동의 진앙지로, 어려운 시절 민족의 여론을 대변하던 민간 의사당으로 우리 근현대사의 결을 따라 그 호흡을 같이 해온 역사의 현장이자, 각종 잡지와 책자들이 발행되고 문화행사가 열리던 문화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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