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세월이 좋아졌다'고 해야 할 것인가? 국내 극장에서는 볼 수 있는 길이 영화제 아니면 결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일찌감치 모든 영화광들이 포기했던, 그래서 한동안 싹 잊혀진 이름이었던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가 무려 두 편이나 정식 수입을 거쳐 곧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71년에 만들어진 컬트 클래식 <엘 토포>와 3년 후 만들어진 그 다음 작품 <홀리 마운틴>이 그것. <엘 토포>는 특히 존 레논이 영화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이 영화의 전세계 판권을 아예 사버렸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조도로프스키 감독은 이 두 편의 개봉과 함께 한국을 방문, 관객들을 직접 만날 계획이다. 이를 위해 3월에 한국을 방한할 계획. 영화개봉 소식에 영화광들은 과연 이 두 편이 무삭제로 개봉될 수 있을지 전전긍긍 관심을 집중시켜 왔으며, 영상물등급위원회는 최종적으로 두 영화 모두 노컷 상영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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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토포 ⓒ프레시안무비 |
길티 플레저의 대명사 조도로프스키 한때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이름은 영화광들에게 있어 은밀한 쾌락, 이른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의 대명사였다. 신성모독과 과도한 폭력이 그로테스크한 초현실주의의 이미지로 수놓아진 그의 영화는, 예술의 창의성과 반항성이 결코 용납되지 못한 채 엄격한 금지만이 난무하고 국가에 대한 복종만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절, 혹은 소위 '문민정부'라는 이름 하에서도 이전의 폭압과 억압이 여전히 그 잔재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던 시절, 결코 우리의 곁을 찾아올 수 없는 머나먼 땅의 장난꾸러기 요정과 같은 존재였다. 영화사를 다룬 책이든 꼭 봐야 할 걸작 영화 100선이든, 어느 리스트에서도 이름이 빠지지 않았던 조도로프스키의 일련의 영화들, 즉 <성스러운 피>(일명 <산타 상그레>), <엘 토포>와 같은 제목들은, 언제나 '구경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멀고 먼 그대의 이름'이거나, 해외를 드나들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은밀히 챙겨와 아는 사람들끼리만 돌려보는 이름'에 불과했다. 영화광들은 원 출처를 모른 채 몇 번이고 복사와 복사를 거듭해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화질의 '불법' 비디오로 그의 영화를 접했다. 혹은, (지금은 유명한 영화감독이 된) 용감한 영화 수입업자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심의라는 이름의 사전 검열에서 가위질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형태로 극장에 잠깐 걸리고는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그의 영화를 보고 싶어했던, 그러나 결코 볼 수 없었던 영화광들은,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센 영화만 만든다고 감독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퍼부으면서 감독의 성에서 유난히 '도'를 된자음으로 발음하곤 했다. 안 그래도 다양한 이유로 원망을 받고 있던 '-스키' 감독들 중에서도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은 단연 원망 제1순위에 오르곤 하던 '–스키' 감독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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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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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은 1929년에 칠레에서 태어났다. 그가 영화를 보며 처음 깊이 빠졌던 분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연출이 아니라 연기, 그 중에서도 마임 연기 분야였다. 1955년에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마임을 배운 그는 그곳에서 롤랑 토포나 페르낭도 아라발과 같은 여러 초현실주의자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이들과는 그리스 신화의 장난꾸러기 요정인 판을 숭배하는 뜻으로 '판의 운동(Panic Movement)'이라는 모임을 결성해 다양한 문화창작 활동을 펼쳤다. 프랑스 시절 그가 찍었다는 단편 실험영화인 <잘려진 머리>는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고 하며, 일반적으로 멕시코에 정착한 뒤 1967년에 만든 영화 <판도와 리스>가 그의 장편 데뷔작으로 언급된다. 1970년에 <엘 토포>를 만들어 미국의 심야프로 사상 최초로 매진을 기록하며 '컬트의 대마왕' 자리에 등극한 그는 73년엔 <홀리 마운틴>을 찍었고, 이 세 작품은 곧 그의 '초현실주의 3부작'으로 불리게 된다. 마임을 공부했던 이력답게 그는 자기 자신이 직접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를 즐겨했으며, 때로는 자신의 아들들과 부인을 영화에 출연시키기도 했다. 열심히 준비했던 대작 프로젝트를 다른 감독에게 뺏기거나(초현실주의 화가였던 살바도르 달리와 오슨 웰즈, 글로리아 스완슨, 그리고 자신의 아들인 브론티스 조도로프스키를 출연시켜 만들려고 했던 프랭크 허버트 원작의 <듄>이 결국 데이빗 린치 감독의 손으로 넘어갔다), 준비하던 영화가 계속 엎어지거나 하며 오랜 동안 절차부심의 기간을 보내며 만화 및 그래픽 노블 등 다른 활동에 전념하다가 1989년, 16년만에 드디어 <산타 상그레>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에게 갈채를 받으며 미국 전역에서 와이드 릴리즈된 영화다. 그러나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을 워낙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며 열렬히 지지했던 골수팬들은, 주류에서 널리 인정받은 <산타 상그레>에 오히려 실망감을 표시했고, 이듬해에 그가 만든 오마 샤리프, 피터 오툴 주연의 영화 <무지개 도둑>은 팬들의 외면 아닌 외면을 받았다.
컬트영화의 부활을 노린다 <엘 토포>의 속편 제작 소식이 몇년째 '소문'으로만 도는 가운데, 그는 최근 <킹 샷>이라는 영화의 제작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과연 이 프로젝트는 무사히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 전세계 팬들이 궁금해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관객들은 기나긴 시간이 지나버린 이제서야 비로소 그의 영화들을 일반 극장에서 정식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억압이 다양한 영화들을 직접적으로 탄압했던 과거와 달리 자본의 논리가 간접적이고 우회한 방식의 배제와 탄압을 가하는 오늘날, 전국 40%의 비율을 차지하는 극장들에서 상영하는 영화만을 보며 이 영화만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지금의 한국 관객들이, 너무 늦게서야 찾아온 옛 컬트감독의 영화에 어느 정도의 애정과 관심을 가질지 호기심을 갖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한국의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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