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의 이미지를 가냘프고 슬픈 우아함에서 어느 순간 힘차고 파워풀한 도약으로 대체해 버린 것은 매튜 본 버전의 발레 <백조의 호수>였다. 그리고 국내에선 소수 중의 소수일 수밖에 없었던 발레팬층을 넘어서서, 무용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에게까지 매튜 본이나 아담 쿠퍼, 필립 마스덴의 이름을 깊이 각인시킨 것은 바로 영화 <빌리 엘리어트>였다. 극장에서 절대적으로 높은 수치의 흥행을 기록한 건 아니었지만, <빌리 엘리어트>의 감동과 꼬마 빌리를 연기한 제이미 벨의 재능은 사람들의 입을 타며 특별한 팬들을 만들어냈다. 극장 종영 후 비디오 출시가 이루어지기 전 6개월의 홀드백 기간(극장에서의 영화상영 후 비디오 출시나 TV 방영 등 2차, 3차 매체로 부가 상영이 있기까지 일정하게 거쳐야 하는 기간) 동안, 많은 팬들이 동네 비디오 대여점으로 몰려가 "도대체 <빌리 엘리어트>의 비디오는 언제 나오는 거냐"며 아우성을 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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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빌리 엘리어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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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국내에서 영화가 개봉된 지도 6년이 지났고,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도 비디오나 DVD를 찾기 힘들어졌다. 그 사이 매튜 본 컴퍼니의 <백조의 호수>는 꽤 여러 번 공연이 이루어졌고 그 때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표가 매진되곤 했다. 그리고 뒤늦게 리 홀의 <빌리 엘리어트> 시나리오 원작에 영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문학 작가이자 카네기상 수상작가인 멜빈 버지스의 손길을 거친 소설판 [빌리 엘리어트]가 출간됐다. 소설 각색이 아닌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가 만들어졌다가 영화의 인기를 바탕으로 활자 매체로 옮겨진 이른바 '영상소설'의 출간이 그간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또한 이 책은 그 누구보다도 우선적으로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웃고 울었던 영화관객들(당시 아마도 주로 20대 초반에서 후반의 나이였던)을 대상으로 할 터이다. 그러나 소설 [빌리 엘리어트]가 조금 특별한 지점은, 이 책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고 눈물을 쏟아낼 이들이 '수능대비용' 고전들의 무게 아래에서 책이라면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는 10대 청소년들이라는 것이다. 소설과 영화는 매체의 차이가 워낙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 둘을 놓고 어느 쪽이 더 낫나를 얘기하는 것은 야채인 피망과 과일인 사과를 놓고 어느 쪽이 더 맛있나를 논하는 것만큼이나 실없는 일이다. 게다가 첫 각인의 강력한 영향력은 언제나 영화면 영화, 소설이면 소설, 처음 본 매체에 좀더 높은 점수를 주게 되기 마련이다. 다만 우리는 각 매체의 특징에 기대어 내적 완성도를 따질 수 있다. 분명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먼저 본 사람들에게, 영화의 플롯을 거의 그대로 쫓아가는 소설 [빌리 엘리어트]는 어쩌면 심심하고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선 그저 한 순간 배우의 얼굴 표정으로만 표현되었던 것이 소설에서는 길고 긴 문장으로 반복되니까. 줄거리 상으로만 보자면, 런던에 오디션을 보러 갈 비용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인 재키가 전당포에 가서 아내의 보석을 맡기며 나누는 대화라던가,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비밀의 후원자 정도가 가장 눈에 띄는 차이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재키가 아내의 보석을 챙기는 장면 바로 뒤에 전당포 앞에서 망설이는 장면만 나온다. 또한 '결정적인 후원자'가 과연 누구인지는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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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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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소설은 영화가 제공하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전달하기도 어렵다. 영화에서 명장면으로 꼽을 만한 각종 다양한 춤 장면들, 즉 윌킨슨 부인과 빌리가 안무를 짜며 추는 춤이라던가, 윌킨슨 부인이 집을 방문해 가족들과 싸울 때 빌리가 그 마음의 답답함과 분노를 표현해 내며 보여주는 춤, 혹은 크리스마스 때 빈 체육관에서 마이클과 춤을 추며 놀다가 아버지에게 들킨 후 빌리가 아버지 앞에서 시위하듯 보여주는 춤은, 소설에서는 그저 짧은 몇 개의 문장으로 아쉽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만의 미덕이 있는 법. 소설 [빌리 엘리어트]의 장점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에 있다. 각 장마다 화자가 빌리에서 재키로, 마이클로, 전당포 주인으로, 토니로 이동하며 다중적인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기에, 각 인물들을 제3자 위치의 카메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영화와 달리, 각 인물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훨씬 더 싶고 깊이있게 이루어진다. 영화 초반 그저 완고하고 답답한 아버지인 듯한 재키가 빌리에 대해 '저 어리벙하고 하나에 빠지면 정신을 못 차리는,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녀석'으로 여기며 걱정에 걱정을 거듭한다던가,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상태의 토니가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실망과 답답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빌리를 바라보며 콩당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에 빠져있는 마이클의 심정은 어떤 것인지, 이른 새벽 아버지와 토니의 싸움을 보며 입은 빌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왜 윌킨슨 선생님에게 그토록 거칠고 버릇없이 반항을 하는지… 소설 [빌리 엘리어트]는, 처음 읽었을 때에는 마치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를 일일이 너무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듯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는, 혹은 두번째 읽을 때에는, 영화에서는 주변 인물이고 주인공을 위해 헌신했던 '조연'인 인물들이 소설에선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들 모두의 희망과 절망, 눈물과 슬픔, 답답함과 분노에 감정이입을 하며 빌리뿐 아니라 아버지, 형, 혹은 친구로서의 인물들 하나하나에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갖게 된다. 게다가 영화나 소설 둘 다 초반엔 '재수없는 형'이었던 토니가, 소설에서는 후반에 빌리를 위해 멋진 연설의 능력을 선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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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프레시안무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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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빌리 엘리어트를 연기했던 제이미 벨은 이제 훌쩍 커버려서 스무 살을 넘긴 미남자가 되었고, 조심스럽게 성인배우로서 신고식을 마쳤으며, 최근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버지의 깃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T-렉스의 음악을 좋아하고, 침대 밑에 토슈즈를 숨기고, 발레 선생님에게 어이없는 말로 반항을 하고(국내 자막은 표현이 '순화'되어서 그렇지 꼬마 빌리가 화가 났을 때 윌킨슨 선생님에게 내뱉는 영어 욕들은 꽤 버릇없고 심한 편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난생 처음 본 발레 학교 다른 오디션 응시자에게 주먹을 날려 버리고, 그러면서도 춤을 출 때만큼은 그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꼬마 빌리는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변함없는 감동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 이제까지는 비디오와 DVD 속에서만 그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빌리와 아버지와 토니와 마이클의 속내와 절망과 꿈을 세밀화처럼 섬세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활자들 속에서도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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